​[뷔민]화양연화 _03


치킨을 먹다 말고 눈물을 쏟아내던 나를 그는 말없이 달래주며 위로해줬다.
콜라 대신 맥주를 건네 오는 걸 거부하지 않고 마셨더니 인사불성까진 아니었지만 취기가 오를 정도로 마셨던 것 같다. 약속했던 2시간이 다가오자 연락해온 태형의 카톡에 오타가 잔뜩 날만큼.


"잠깐만, 데려다줄게"
"후아 저 진짜 멀쩡해요! 형도 술 마셔서 안돼요!"
 "택시 타고 가면 되지"
 "으에 진차 오버에여. 밖에 나오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부축할 정도도 아니고 멀쩡히 걸어가다가 약간씩 느려
지는 걸음걸이가 불안했지만 데려다준다는 말에도 한사코 거절을 하는 지민에 택시를 불렀다. 태워 보내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기사에게 돈을 더 얹어주며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잊지 않고서
 

"형, 죄송해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오늘"


유리창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고 울어서 퉁퉁 부운 눈으로 손을 흔들며 사르르 웃어오는 지민의 모습이 보내기 싫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나 싶을 만큼 무감각해져 있던 잔잔했던 일상이 엄청나게 변할 것만 같은 기분에 설레면서도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곁에 두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두려워졌다.
 
멀어지는 최현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자리에 바로 앉았다.

 

태태-

손안에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보니 억지로 웃고 있던 입꼬리가 내려갔다.
속이 또 울렁거렸다.
적막한 택시 안 끊임없이 울리는 진동에 기사님 눈치가 보여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씨 어디고?'
'한남대교'
'후우... 술 많이 마셨.. 알았다. 사거리 앞에 있을게. 조심히 온나"


많이 마셨냐고 물어오는 카톡에 답장을 하지 않아서 인지 통화하는 중에도 걱정스레 물어오는 태형의 목소리에 또 설레었다.
항상 혼자 상처받아 너덜너덜해진 아픈 가슴에 김태형이 온기를 불어넣어주면 또 참을 수 있었다.
우린 친구고 함께 동고동락하는 멤버이고 또 같은 남자인데 포기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은데 놓을 수가 없었다.
시작도 끝도 너무 명확한 혼자 하는 이 사랑이 힘들어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놓고 싶지 않았다.


"박지민!"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멀리 서있어도 태형만 잘 보였다.
걸음이 느린 나 대신 급하게 달려오는 태형의 품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윽, 술냄새"
"냄새나나?"


툴툴대면서도 걱정스레 어깨를 잡아오는 태형에 아까의 서운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분명 태형도 나에게 미안한 감정 때문에 아무 말 없이 이유도 물어보지 않고 술을 마시고 온 나를 타박하지도 않고 기다렸을 터였다.



"한 바퀴 돌고 갈까?"
 


잘따라 가다 점점 걸음이 느려지는 내가 답답했는지 무릎을 굽혀 등을 내미는 태형의 뒷모습에 또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아까는 미안"


엉덩이를 받친 손을 톡톡 치며 멋쩍은듯한 목소리가 잔잔한 새벽 골목길을 울렸다. 밍밍한 여름 공기에 땀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지만 나도-작게 대답하며 태형의 목을 더 끌어안았다. 크게 싸운 적은 없지만 동갑이다 보니 자주 다투기도 했고 사소한 일에도 감정 상하는 일도 많았다. 다투고 난 후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서로가 조심하게 됐지만 가끔씩 이렇게 태형이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면 허무해졌다. 막무가내인 내가 짜증 날텐 데도 배려해주고 감싸주는 저 애의 순수한 마음에 대한 내 마음과의 갭 차이가 너무 커서 미안했다.



"태형아. 나 이제 괜찮으니까 너무 애쓰지 마"


이미 데뷔가 확정된 그룹에 꼽사리 끼듯이 마지막에 합류한 나에게 쏟아진 시기와 질투 그리고 텃세까지 18살의 난 감당하지 못할 만큼 힘들었고 매일이 눈물바람이었다. 무용밖에 모르던 바보 같은 나와 소속사의 큰 기대를 받던 동갑인 태형과는 항상 비교당했었다.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해낼 것 같았던 어린 날의 치기는 막상 부딪힌 현실에 절망적이었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난 질투라는 감정으로 태형일 시기하고 미워했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어도 그 시절 태형이는 이미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렇게 겉으론 한없이 친한 친구 사이였던 우리에게 그 일은 많은 변화를 가져다줬다.
실력이 부족하면 잠을 줄여가며 더 열심히 노력하면 됐지만 내 노력에 비례하게 현실은 냉정했고 어울리지 않은 자리 맡지 않은 옷을 입고 입다며 사람들의 평가와 비난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벼랑 끝에 내몰리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어린 나이에 충동적으로 한 번쯤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결심하는 그 순간은 찰나였다. 사람이 한계에 다다르면 못 할 게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연습에 지쳐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옥상으로 향했던 나는 정말 삶에 미련이 없었다.
우울의 전조증상을 느낀 건지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던 건지 난간에 오르던 나를 낚아채 품 안으로 끌어당긴 것은 태형이었다. 혹여나 품에서 벗어나 뛰어내릴까 봐 난간을 등진채로 있던 태형의 품 안에서 미친놈처럼 죽어버리고 싶다고 악을 쓰며 울던 내가 충격적이었던 건지 아님 같은 멤버라는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그 후 태형인 나를 감싸고돌며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의지 할 곳이라곤 꿈 하나만 바라보고 모인 아직은 어린 멤버들 뿐이던 현실에 태형인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던 형 같은 친구였다.
곁에서 말없이 묵묵히 지켜주던 태형이 너무 미워서 착한 척하지 말라며 상처되는 말만 골라하며 태형일 괴롭게 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먼저 다가와준 것도 태형이었고 치부까지 다 들켜서 바닥을 본 것도 태형이었다. 한창 모나고 뾰족했던 나를 정이 많고 따뜻한 태형인 한결같이 다정하게 대해줬고 어느 날 정말 갑작스러운 어느 날 그 다정함이 미묘하게 다가와서 나는 더 이상 태형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지수가 맨날 너네 데이트할 때마다 껴서 날 얼마나 눈치 없는 애로 보겠어"
"와- 야, 니 그 얘기하면 윤지수 졸라 서운해할걸. 안 그래도 지수가 니 뭔 일 있냐고 왜 같이 안 놀아주냐고 그랬는데"
"바보가. 네가 맨날 지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내 끌고 나타나는데 어떻게 싫다고 하노"


처음에 내 감정을 인지하고 나서부턴 나에게 관심을 쏟고 걱정해주는 태형이 너무 좋았다. 어리석게도 혹시나 내가 또 딴마음을 먹을까 두려워하던 태형의 마음까지도 좋았다.


"바빠서 잘 보지도 못하는데 신경 써줘. 나한테는 이제 신경 끄고"
 "박지민 마이 컸네. 이 엉아 아니면 안 된다고 친구는 내뿐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렇듯 우리 둘 사이는 묘했다.
태형이도 나도 서로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이 존재했고 서로에 대한 믿음도 강해 서로에게 의지하고 의지 받는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 우월감에 젖어서 태형이 나를 절대 버리거나 떠날 리 없다고 자만했기에 족쇄처럼 들러붙어 있는 내가 저 애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왔었다.


"...... 너뿐이지..."
 "어? 뭐라고?"

추슬러 업으면서 물어오는 태형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웅얼거렸다. 고요한 골목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내 목소리는 태형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혼자 태형에게 이별을 고하고 다시 붙잡고 하는 이 마음을 정말로 놓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돼지야. 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무거워 죽겠다"
"지수랑 뭐했노?"
"또복이네 갔지"
"맛있었겠다. 지수는 델다줬나?"
"아니. 지 혼자 간다던데"
"야. 진짜 니 바보가"
"아니 엎으지면 코 닿는데 뭘 델다줘. 닌 누구랑 술 마셨노?"
"난 진짜 지수가 니랑 왜 사귀는지 모르겠다."
"누가 보면 니가 지수 남자 친구인 줄. 아 누구랑 마셨냐니까"
"누군지 말하면 니가 아나"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어쭈-거리면서 몸을 흔들면서 장난치는 태형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왁왁 거리며 매달리자 내 모습에 웃음이 터진 우리는 조용한 골목이 떠나가라 티격태격 대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 이렇게라도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고 이렇게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요새 또 다이어트를 한다며 식단 조절을 하는 중이라 애가 또 예민해지려 해서 일부러 치킨을 먹이려고 데리고 나왔더니 지수를 보자마자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하려는 지민이 이상했다.

 

"태형아"

"김태형!"
"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아니야"
 

아지트와도 같은 허름하고 조용한 치킨집은 항상 태형과 자주 데이트하던 곳이었다.
연습생 때부터 지민과 다녔다던 동네 호프집을 처음 소개해주던 날도 얼마나 뿌듯해하던지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해 항상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남자들의 우정
은 다 그런가 생각하며 유별나긴 했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아니었다. 중학교 동창이자 첫사랑이었던 태형과 우연히 연락이 닿아 썸을 타던시기부터 같이 어울려 놀던 지민과도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의 친한 친구 사이가 되어있었다. 태형의 연애경험이 적지 않다는 것도 지민을 통해 들었었다. 언젠가 태형의 전 여자 친구들과 넌 다른 것 같다며 진중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지민에 꼭 태형과의 교제를 허락받은 기분이 들었었다. 셋이서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는 게 익숙해질 때쯤 점점 지민이 셋이서 함께하는 자리를 불편해하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커플 사이에서 민망함 정도로 여겼었는데 문득 고개를 돌리다 마주친 지민의 시선은 잔뜩 억울한 표정이었다.
태형이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님 당사자인 지민이에게 물어봐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연습하느라 힘들어서 허기가 진다며 치킨을 먹으면서도 한 손에 핸드폰을 놓지 않는 태형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태형아, 빨리 치킨 먼저 먹어"
"어어, 잠시만, 이것만 보내고"


연신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건지 타자를 두드리는 걸 보며 슬며시 말을 꺼냈다.


"태형아, 지민이 무슨 일 있어?"
"왜?"
"아, 그냥 요새 우리 같이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다이어트한다고 요새 또 예민해"
"그래?"
"아까도 내가 피시방 가자 하고 데리고 나왔는데 갑자기 간다 그러더라고"


태형의 말을 들어보니 분명 지민이에게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를 안 했을 터였다. 태형은 뭐든지 즉흥적이었다.


"그래서 지금 지민이한테 연락하는 거야?"
 "어, 응"
"아까 나있다고 안 했지?"
 "응, 오늘 분위기가 나오면 안 될 분위기여서. 우리 못 본 지 넘 오래됐잖아"


눈을 맞춰오며 씩 웃는 태형 때문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뻔뻔스러우면서도 다정한 태형 때문에 기다림이 힘들지 않았다. 여느 연인들처럼 평범한 연애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만큼 태형과의 연애가 어렵고 힘들었지만 오롯이 저를 위해주는 태형을 볼 때면 너무 행복했다.


"고마워. 그래두 담부턴 지민이한테 먼저 얘기해. 지민이가 자리 피해 줬잖아"
 "아, 내가 잘못한 거야?"
 "그것보다 지민이 당황했겠지"
"으음, 그런가"
 


항상 지민을 챙기며 끼고도는 태형 때문에 덩달아서 지민이 불편할까 봐 잘 지내려고 했었다. 셋이서 만나면 남들의 시선은 편했지만 가끔은 둘만 있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에 지민의 존재가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 지금은 태형에게 신경 쓰기도 벅차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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