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아니 좋은 게 맞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어났을 때 몸도 가볍고 잠도 푹 자고 일어난 느낌이어서 오늘 하루는 왠지 모든 일이 잘 될 것만 같았다. 출국 전까지는 안무 연습을 제외하고는 스케줄이 없어서 오전엔 주로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모자란 잠을 보충해야 한다며 아직도 꿈나라인 멤버가 거의 다였다. 나는 곧 윤기 형 생일이라서 선물도 사야 했고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싶어서 나갈 준비를 했다. 시간이 빠르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두세 달에 한 번씩 멤버들 생일 선물 챙기다보면 어느새 일 년이 금방이었다. 윤기 형은 정말 그 일 년 중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다. 물론 일 년뿐 아니라 항상 소중했지만 태형이와 나의 일 년에 윤기형은 항상 고마운 사람이었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형, 윤기 형 바빠요?”
갑자기 어디에 있냐며 연락해온 석진이 형과 백화점에서 만나서 실컷 쇼핑하다 보니 어느새 무거워진 양 손에 괜히 석진이 형한테 왜 안 말리고 보고만 있었냐며 화를 냈는데 석진이 형 양 손에도 수북한 쇼핑백에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분명 기분전환은 확실히 했는데 그에 따라오는 엄청난 카드값에 후회를 할게 분명했다. 태형이가 즐겨 입는 브랜드를 구경하다 눈에 띈 화려한 셔츠를 보니 나도 모르게 결제를 하고 있었고 거기에 어울릴 것 같은 타이까지 추천받아 사서 매장을 나올 때까지 태형이 생일선물을 미리 준비한 거라고 합리화하는 나에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단체방에 호석이 형이 윤기 형 어디냐며 물어도 쌩 전화를 해도 씹혔다며 징징거리는 형을 뒤로하고 작업실로 가니 한창 곡 작업 중인 예민한 슈가 씨가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것인지 아직까지 정확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지금 이대로 질질 끌기에는 모두에게 독이 될 게 뻔해서 결정을 해야 했다. 그중에 아버지가 제일 큰 이유였지만 거기다 해외투어와 함께 나오던 미국 진출은 꿈이 아니었고 현실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사실 두려워졌다. 나와 태형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 더욱더 힘들어질 형들을 생각하니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가끔은 태형일 덜 좋아하게 되거나 마음이 좀 작아져서 아무렇지 않았으면 했다. 그랬다면 팀에도 가족들에게도 이렇게 죄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나만 조금 힘들고 말았을 텐데 하고
“아 진짜 다 같이 오든가! 너네 진짜, 도어록을 진짜 달던가 해야지 아으.”
“행님.”
오랜만에 흑슈가로 변한 윤기형 때문에 작업실에 발도 못 딛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문을 잠그던지 왜 나한테 불똥이 다 튀어버려서는... 문을 닫고 아예 잠가버렸다. 또 누군가가 들어왔다가는 윤기형 입에서 진짜 리얼한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 왜, 뭔 일인데 또 문까지 걸어 잠가.”
“그냥 오랜만에 얘기 좀 하게요.”
“무섭다 지민아 진짜.”
작업하던 것들은 모두 멈추고 물병을 집어 드는 형 곁에 보조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맨 정신에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아서 조금 망설이니까 형은 재촉하지 않고 내가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남준이 형을 찾아가야 했지만 실낱같은 희망 때문에 또 매달리듯 윤기 형을 찾았다. 나에게 윤기 형은 그랬다. 겨우 2살 위 형인데도 형은 모든 걸 알고 있고 모르는 게 없었다. 남들은 형이 무뚝뚝하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라고들 하지만 형은 항상 따뜻하고 자기 바운더리 안에선 애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천천히 물을 들이켜고 의자에 한껏 기댄 윤기형의 나른한 시선에 볼 안쪽 살을 한 번 꾹 깨물고 입을 열었다.
“태형이랑 저 그만하려고요.”
아무 대꾸도 반응도 없는 윤기형 얼굴을 힐끔대니까 필짱을 끼고 더 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한참 생각을 고르고 다시 입을 뗐다.
“태형이 아버지, 아버지께서 알게 되셨어요.”
억울하기도 슬프기도 해서 누군가에게 터놓지 않고서는 못 버틸 것 같았다. 담담하게 말하고 싶어도 계속 속에서 울컥 치솟는 설움에 형을 마주한 시선을 떨굴수밖에 없었다.
“태형이가, 이번에 말씀드렸나 봐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피디님 뵈러 어, 올라오셨는데 그게 태형이 계약...해지해달라고...후우..화가 많이 나셨다고 하더라구요.”
“피디님은 아직 모르시는데....혹시 알게 되시면 형들이랑 매니저형들도 곤란해지실 거고 어, 그전에 아버지께서 태형이 가만히 안 두실 거 같아서.”
“그래? 그럼 헤어지면 되겠네 뭐가 문젠데.”
“형.”
“대단하게 굴길래 뭐 얼마나 오래가나 했다.”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꾹꾹 눌러 담고 말하기 무색하게 형의 한마디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언제고 내 편일 것같던 형이 아무렇지 않게 우리의 마지막을 얘기하고 있어서 숨이 막혀왔다.
“왜 그럼 내가 헤어지지 말라고 붙잡아야 되는거냐?”
“형...”
“사귀기 전부터 헤어짐까지 뭐 하나 너네가 선택한게 있긴 하냐 너네가 정말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맞긴 하냐고.”
정말 무미건조한 형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내가 불쌍해 보이지도 않았고 나를 안타깝게 보지도 않았다. 형이 하는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서 그 순간엔 형이 너무 밉고 원망스러워서 윤기형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기엔 충격이 상당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얘기해요...형은 우리 편 이잖아요, 형은.”
“야 편이 어딨어, 너나 김태형이나 큰 착각하고 있네. 너 이미 마음먹었잖아 태형이랑 헤어질 거 생각하고 있으면서 굳이 나한테 뭐하러 얘기해.”
믿었던 형마저 돌아서니 정말로 모두가 태형이와의 끝을 바라는 거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어봐도 눈가에 고이는 눈물에 속수무책이었다. 가만히 있는 형을 찾아와서 짜증내고 울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형은 참 형 다웠다.
“하아... 진짜 내가 헤어지자고 했냐 왜 나한테 그래 너. 지금 이 그림 웃긴 거 알지.”
어허엉. 나한테는 적어도 애정의 온도로 보듬어 줄지 알았지 저렇게 냉정하고 잔인하게 얘기할지 몰라서 서러움이 터진 울음소리가 제법 커졌었다. 정말로 형이 나에게 이별을 선언한 것처럼 그냥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똑똑
똑똑!
내 울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던 문 소리에 울음이 잠시 멈췄지만 의자에 기댄 채로 귀찮은 듯한 형의 표정을 보니 갑자기 더 짜증이 나서 더 크게 소리를 내면서 우니까 문을 두드리는 손길이 갑자기 다급해진 것 같았다.
“....기 형. 윤기 형!...어, 지민이야? 짐나, 우나?”
방음 장치가 잘된 문을 뚫고도 들리는 태형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김태형이 왜 왔지 어디 박지민 레이더라도 부착했는지 귀신같이 알고선 찾아온 태형이의 방문에 윤기 형도 놀란 눈치였다. 조금만 울어도 퉁퉁 붓는 내 눈을 한 번 힐긋 밖에서
문고리를 부서져라 돌리면서 잠긴 문을 두드리는 태형이를 힐긋 윤기 형 얼굴에 귀찮음이 잔뜩 했다. 대답도 없고 문조차 열릴 생각을 안 하니 안달이 난 태형인 나를 부르면서 문짝이 떨어져라 흔들었다.
“새끼야 문 짝 떨어지면...”
“짐나!
야 왜 울어. 니 왜 우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윤기 형을 밀치고 녹음실로 들어선 태형인 또 또 삼백안 같은 눈을 하고선 형을 한 번, 울어서 퉁퉁 부은 내 얼굴을 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진짜 윤기 형 말마따나 웃긴 그림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젤 보고 싶지 않고 숨고 싶은 사람 앞에서 최악의 상황과 상태를 보이고 있으니 윤기 형 작업실에 쥐구멍이라도 있었음 했다.
“왜 우냐고,
형이 뭐라 그랬어요?”
태형이 딴에도 이 상황을 엄청 참고 윤기 형에게 물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지치고 짜증 난 윤기형 입장에선 분명 좋은 소리는 나가지 않을게...
“하아..그랬으면? 뭐 어쩌게.”
분명했다.
“그냥 너네 헤어져라.”
“형!” “윤기형.”
윤기 형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도끼눈을 뜬 태형이의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 상당했다. 담담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서 올려다보는 형의 시선에 화가 난 태형인 끓어오르는 분노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주먹을 쥐었다 어쩔 줄 몰라했다.
“처음부터 그게 맞는 거였어. 이제 그만해라 너네 둘.”
“형! 지민이한테, 애한테 애 불러서 이딴 개소리한거 에요? 그래서 맨날 가족 같다던 동생 울리니까 속 시원해요? 형이 어떻게, 어떻게 이래요?”
“태형아! 그만해 그만, 알겠어요 형. 형 생각 알겠으니까 그만해요!”
여전히 도끼눈을 뜬 태형일 말리며 팔을 잡아당겨도
태형이도 마찬가지로 믿었던 형이 우리를 반대하니 충격이 상당한 지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안 그래도 화났다 하면 물불 안 가리는 두 사람이라서 이대로는 끝을 볼 것 같아 작업실 밖으로 태형일 밀어냈다. 힘없이 나가는 뒷모습에 또 울컥했다. 무감각한 눈으로 우릴 바라보는 형의 시선에 마음이 아파왔다.
“윤기 형.
형은 그래도 제가 아는 우리 형은 우리 편일 거라 생각했어요. 적어도 형은 우리 손가락질은 안 하니까.
우리더러 우리가 잘못됐다고는 안 했잖아요”
작업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끌어당기는 힘에 그대로 비어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손목을 붙잡은 힘과 싸늘한 태형이의 뒷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불 꺼진 연습실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말없이 서있는 태형이를 밀어내고 불을 켜니까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우는 손길에 드디어 얼굴을 마주했다.
“하아...윤기 형이 진짜 뭐라 하드나? 신경 쓰지 마. 뭐하러 듣고 있었노 그냥 나오지, 으이고 울기는 뭐하러 우노 걍 쌩까라. 형이 작업하다가 스트레스받아서 씅질났는갑다.”
윤기 형에게 안 좋은 소릴 듣고 거기다 울기까지 한 내 기분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걱정이 한가득인 태형인 나를 달래려고 작업실에서 화를 냈던걸 무색하게 다정하게 내 눈을 맞추며 달래 왔다.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여가며 내 얼굴을 바라보며 웃어주는 태형이의 미소에 속이 울렁거렸다. 너를 진짜 놓을 수 있을까, 형이 우릴 갈라놓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놓는 건데도 그런데도 네가 날 보고 웃어줄 수 있을까
“왜 항상 닌 제멋대로야?”
“엉?”
“그냥.....우리 그냥 이대로 지냈어도 됐잖아.”
“짐나 진짜 윤기형이 형이 우리 헤어지라 하드나.”
“태형아 우리 진짜...”
“뭔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상처받은듯한 태형이의 눈을 마주하니까 몇 번이나 생각하고 고민하고 연습했던 말들은 목구멍에서부터 걸린 듯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내가 널 밀어내. 차마 끝맺지 못한 말에도 상처받는 너인데 내 말 한마디에 내 행동 하나하나에 걱정하고 고민하는 너를. 밀어내려는 돌아서려고 하는 나를 끌어안는 태형이의 품에 그 다정함에 결국 또 결심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잠깐 아주 잠깐의 유예일 뿐이었다.
눈만 감으면 아른거리는 태형이 아버지의 원망스러운
얼굴과 아무것도 모르시고 그저 아들이 최고라 하던 부모님, 회사 식구들, 피디님, 그리고 멤버들까지 모두 아른거려서 모른 척 하기에는 우릴 위해 희생하고 힘써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태형이를 계속 붙잡고 있을 용기가 없었다.
“난리 났겠지?”
“이미 버스는 떠났다. 그냥 생각하지 말자.”
연습생 때는 정말 말 그대로 연습생이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사라진다고 해서 잡으러 간다던가 찾으러 가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내가 없어진다면 그 빈자리는 언제든지 다른 이들로 채워질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스물셋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그때와 비교할순 없지만 아직도 어리다면 어린 우리 둘은 열아홉 살 때와 마찬가지로 일탈을 꿈꿨다.
무작정 떠날 수 있는 곳으로 방법을 검색하고 계획에도 없던 일탈을 하기 위해 수고스럽지만 따라붙는 눈들을 피해 만나기까지 첩보영화 방불케 하는 스릴은 있었지만 번거롭고 급 귀찮음이 몰아쳐서 중간에 포기하려 몇 번이나 망설였다. 핸드폰은 진작에 태형이가 가져가서 꺼버렸고 예매한 버스 티켓 번호만 달달 외우며 터미널로 오는 내내 불안해서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속상했다. 몇 년 사이에 바보가 된 것만 같아서, 막차는 아니었지만 평일 저녁에 강릉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터미널이 한산했다.도착하니까 그제야 망설여졌다.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 선택이 좋은 추억으로 간직될지 아님 아픈 추억으로 남아 이후에 혼자 오롯이 감당할수있을지 상상이 안돼서 조금 겁도 났다.
“안 타고 뭐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뒤를 도니까 모자 아래로 보이는 장난기 가득한 눈과 마주쳤다. 손 목에 달랑거리는 봉투를 눈 앞에 흔드는 태형이 얼굴을 보니까 그제야 안심이 됐다.
버스에 올라 커튼을 치고 나서야 마스크와 모자로 꽁꽁 싸매고 머리색 때문에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까지 벗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이 없고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지만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태형이와 따로 출발해서 버스에서 만나기로 했고 먼저 도착했던 태형인 배가 고파서 편의점을 들렀다 온 참이었다. 열아홉 돈이 없어 소시지 하나를 나눠먹던 일탈과는 많이 달랐다. 버스가 천천히 출발했다.
“대게 밋밋하네. 부산은 밤에도 번쩍번쩍한데.”
“조용하고 좋구만, 닌 부산 살 때는 바다 잘 안 갔다면서.”
“그러게 그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지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니랑 지금 왔잖아.”
아직은 추운 날씨 탓에 백사장을 걷는 사람들은 우리를 제외하고 몇 커플 정도 그것마저도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다들 사람들 눈을 피하려 자꾸만 서로서로 멀어지는 게 웃겼다. 멀리서 보면 우리도 그냥 평범한 커플로 보일듯했다. 하도 꽁꽁 싸매서 수상해 보이긴 하겠지만 두꺼운 패딩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기껏 도망쳐 온 곳이 두 달 전 촬영하러 왔던 바다였다. 그나마도 와봤던 곳이고 익숙하면서 사람이 많지 않은 곳
“밤바다는 처음인데 좋다. 그자? 이래서 커플끼리 오는 갑다.”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깍지를 껴오며 능청스레 웃는 태형이 때문에 그나마도 마음 한편에 있던 불안감이 싹 사라졌다.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발맞춰 걷고 조용하고 잔잔한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롯이 서로에게만 집중한 이 시간이 눈물 나도록 감사했다. 촬영 내내 찬바람에 괴롭기만 하던 겨울바다는 감흥도 없었는데 태형이와 함께인 것만으로 봄날이었다.
마주 잡은 손이 따뜻했다.
*
집 나오면 개고생이란 말이 딱인 게 우리 둘 다 비린 거 생선은 싫어하다 보니 밥집을 찾아다니느라 꽤 고생했다. 근처엔 죄다 횟집뿐이어서 배를 채울 수 있는것들이 없었다. 로맨틱도 좋은데 밤바람 맞으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춥고 배고파서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횟집 반 펜션 반. 그 흔한 치킨집도 없었다.
“지민아 인제 치킨은 사친 거 같다. 편의점이라도 찾아봐봐.”
“여기서 짜장면 시키면 안 올까? 아, 이 시간엔 중국집도 문 닫았겠지.”
“바보야 전화가 안되잖아. 이제 방이라도 체크인하자 이러다 길에서 잠자게 생겼다.”
“배고프다고! 폰 잠깐만 켰다 끄자. 어?”
진짜 무계획이 무서운 게 핸드폰조차 다 꺼둬서 둘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두 다리로 발품을 팔다 보니 기력이 딸렸다. 먹는 얘기 하니까 배가 더 고팠다. 조그마한 바다라서 호텔은 고사하고 콘도 정도의 숙소도 없었다. 좀 떴다고 호텔 아니면 잠을 못 잔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모텔이나 펜션은 정말 가 본 적이 없어서 뭔가 불안했다. 근데 그것마저도 방이 없다고 퇴짜를 맞으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됐다. 젤 깨끗하고 큰 펜션에 서로 가서 방 있냐고 물어보라고 등 떠밀다 세 군데쯤 거절당했을 때 정말 이러다 택시 타고 당장 서울로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까 태형이도 어이가 없는지 둘이서 또 한참을 실없이 웃었다. 뭔가 마음먹은 대로 안 되니까 짜증은 나지만 이런 상황들 자체가 너무 웃겼다. 물론 둘이 함께니까 함께라서 걱정은 안 되었다.
“자 잠깐만! 여기서 자자고?”
“겉에는 이런데 안에는 깨끗하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아노, 으 태형아 여긴 좀 아닌 거 같다.”
잠시 쉬었다 다시 찾으러 가자며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좋은 생각이 있다며 막 어디론가 다녀오더니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사람도 없대 어, 방도 엄청 크고 오션뷰에 마트도 있고 또 엄청 싸! 사장님이 나 잘생겼다고 만원 깎아주셨다 4만 원 줬어.”
“그래도 여긴 좀....그리고 마트가 아니라 그냥.”
“그치 콘돔은 없어보이제, 아 진짜 알았다! 오늘은 쫌 참으께 내가, 손만 잡고 잘게 됐지.”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민박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 태형이때문에 뒤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태형이랑 같이하는건 다 좋기는 한데 가끔씩 못 미덥기도 해서 약간의 의심이 됐을 뿐이었다.
“치킨 시킬까? 내가 사장님한테 물어봐서 번호 땄지.”
하여튼 넉살은 우주 최강이었다. 알록달록한 치킨 전단지를 흔들며 전화를 거는 뒷모습을 보며 방 안을 들어서니 진짜 방이 숙소 거실만했다. 들어가서 보이는 커다란 창은 사장님이 자랑하시는 일출을 볼 수 있게 시원하게 뻥 뚫려있었다. 지금은 온 통 밖이 까맸지만 희미한 바다 냄새에 정말 바다가 코 앞에 있다는 걸 알았다. 비수기여서 그런지 정말 민박집이 조용했다. 난방도 조금 전에 켜서 따뜻해지려면 한참 걸린다는 태형이가 민박집 사장님 같아서 웃으니까 사장님 고스톱 치러 가야 한다고 자기한테 다 일임하고 가셨다고 설명을 하더니 그대로 침대로 가 엎어졌다. 옷 입은 그대로 올라가길래 잔소리가 먼저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고 나도 침대로 돌진했다. 오늘 하루가 정말 길고 길어서 너무 힘들었다. 당장 내일 돌아가면 일단 형범이 형한테 영혼까지 탈탈 털릴 테고 아마도 최악의 상황이라면 이사님께 소환당할 수도 있을게 분명했다. 방 크기에 비해 침대가 좀 좁아서 태형이 팔 위로 포개 누워있으니까 팔이 저린지 끙끙거리길래 치워내고 누우니까 못 볼꼴을 본 사람처럼 쳐다보길래 왜 그러냐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냐면서 어이없는 소리를 해댔다.
“자 다시 대. 팔 줘봐.”
“이잉 싫어 이렇게 할래.”
팔을 붙들고 유치하게 투닥거리다 움직이지 못하게 나를 껴안고 옭아매는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팔다리 길이부터 달라서 부둥켜안아오는 걸 벗어날 수가 없어서 낑낑거리며 한참을 안겨있었다.
짠
같이하자고 조르는 걸 물리치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깨끗하게 하고 사이좋게 다리 하나씩 뜯으며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니까 너무 행복해서 절로 어깨가 들썩거렸다. 사실 소맥이 먹고 싶어서 소주 얘기했다가 가자미 눈을 뜨고 째려보길래 아무렇지 않은 척 맥주를 홀짝였다. 둘이서 마시거나 숙소에서 마시는 건 괜찮다고 해놓고서는 말 바꾼다고 구시렁 거리니까 또 삼백안이 되려는 걸 간신히 말렸다. 술 마신 날엔 맨날 아무한테나 애교 부린다고 태형이가 엄청 싫어했다. 애교 아니라고 해도 자기 눈에 귀여우면 다 애교라면서 한 병 이상 못 마시게 했다.
“짐나 근데 진짜 윤기 형이랑 무슨 말했어?”
“짠.”
“왜에 또 말하기 싫나?”
“니는? 태형아 닌 내한테 할 말 없나?”
응 없는뎅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태형이의 대답에 긴장했던 몸이 확 풀어졌다. 처음엔 태형이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냥 사실 숨길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부모님께 말할 용기는 없었고 회사에도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되도록이면 최후의 상황까지 갔을 때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 둘만 좋으면 이 행복은 깨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남준이 형 말대로 우리를 인정해주는 형들도 있고 부모님은 정말 별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었다. 근데 그렇다고 태형이한테 사실대로 말할 용기도 없었고 우리의 위태로운 사랑을 지켜낼 힘도 없어서 매일이 괴로웠다.
잠이 안 와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자꾸만 불안하고 이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끝일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한심해서 맨 정신으로는 미칠 것만 같았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바람에 온 몸이 춥고 아려왔지만 태형이 곁에서 잠들 수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이미 끝나 있을까봐 아직은 어스름한 밤바다는 무섭기만 했다.
찬바람을 타고 스며드는 익숙한 체취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등을 감싸 오는 포근함과 따뜻한 품에 평온을 느꼈다. 어느샌가 서로에게 길들여진 우린 한 사람의 부재에 허전해지면 그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다. 익숙하고 편안한 품에 불안에 날뛰던 심장도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찬 기운을 잔뜩 품은 목덜미에 닿아오는 온기에 기분이 좋았다.태형이의 손을 끌어다 내 주머니속에 밀어 넣었다. 손 안에 잡히는 네모난 곽에 태형이가 크게 소리내 웃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며 완전한 평안 그 자체였다.
“읏.”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맞춰오는 태형이의 입술에 움찔거렸고 뒷 목을 끌어당기며 더 깊게 들어오는 혀에 입을 벌렸다. 파고드는 혀를 빨아 당기며 태형이허리를 끌어안았다. 틈도 없이 끌어안은 몸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키스했다. 서로의 숨결에 온 몸이 달아올라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숨도 모자랄 만큼 격렬하게 혀를 섞다 보니 이대로 키스하다 숨이 막혀서 죽는다 해도 꽤 낭만적일 것 같았다.
윽. 딴생각에 빠지는걸 귀신같이 알아채고선 아랫입술을 꾹 씹고는 약 올리듯 혀로 핥아오는 태형이가 귀여워 팔을 들어 얼굴을 감싸 안고 살짝 밀어냈다. 넓은 창을 타고 새어 들어오는 빛에 비친 태형이의 눈동자는 빛나다 못해 아름다웠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애정은 달콤하다 못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눈으로 다 말해주고 있었다. 날 사랑한다고
“나도.”
나도 너 사랑해. 잘생기고 아름다운 너를
태형이의 애정에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들어 입을 맞췄다. 가볍게 맞닿는 입술이 어떻게 이렇게 좋을까 넘쳐흐르는 내 감정도 너에게 닿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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