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장.
불이不二
말 그대로 황궁이 난리가 났다. 연의 세자에게 태자비의 자리를 내어달라 국혼을 하겠다는 태자의 말에 황제는 물론 문무대신들의 빗발치는 상소에 며칠의 날을 샌 태자의 낯빛도 수척했다. 적당히 장단만 맞추어주면 되는 연기였다. 세자를 속인 것도 아니고 국가 간의 아니 천국을 향한 연의 복종과 군신지맹의 관계를 견고히 하기 위한 밑거름 이란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세자를 내명부에 배속시킨 것은 황자들과 어울려 반역이라도 꾀할까 미리서부터 모든 걸 차단한 황제의 지략이었지만 대충 흉내만 내는 걸로 모든 얘기가 끝났건만 그것을 모두 뒤집어버렸다. 바로 대 천해국 장차 황위를 이어받을 황태자께서
“전하...옥체가 상하실까 저어됩니다 그만 침수에 드시지요”
소소문의 걱정 어린 충심에도 사내답고 훤칠한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 펴질 줄을 몰랐다.
“깨어났느냐?”
“그게 아직...미령 하신 것 같사옵니다”
“가벼운 풍한인데 어찌 이리 못 일어난단 말이냐 태의가 돌팔이가 아니고서야 사흘이 다되도록 자리보전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것이 본국의 기후에 상한(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감수한 것)이 단단히 든 것인지 세자의 원기가 허하여 회복이 더디다고....”
“밖에 고것 조금 있었다고, 사내놈이 허약해 빠져서는”
불퉁한 낯빛으로 읽던 상서를 탁자 위로 집어던지며 의자에 한껏 몸을 기대었다. 그날 그대로 혼절한 세자를 품에 안고 울던 그 발칙한 궁인을 밀어내고 품에 안았을 때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틀어지면 부서질 것 같은 아이같이 여린 몸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음에 느낀 희열인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한과 복수의 대상을 손에 취함으로써 느낀 기쁨인지 묘하고 기이했다.
“답답하구나 바람을 좀 쐬어야겠다”
월대月臺에 올라서 저수궁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니 이미 술시에 접어들어 사위가 어두워 모두가 잠든 궁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원체 줄줄이 굴비 짝 같이 달고 다니는 걸 싫어해 황제폐하를 배알 할 때를 제외하고는 태감과 호위, 사내들만 추려 다니기 일쑤였고 위엄과 체통을 지키라는 소소문의 쇄언에도 독존獨存이신 태자 마마를 어찌 이길 수가 있을까
걸음을 옮기시는 묘하게 들뜬 태자의 뒤를 따르는 태감과 호위가 단출했다.
열이 오른 세자를 손수 안아들었다.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가벼움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퉁퉁하게 부운 눈두덩이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살덩이가 많은데도 눈을 뜨면 제법 컸다. 눈동자가 검고 동그래서 그런지 귀엽기도 하였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얼굴은 그대로 몸만 조금 더 컸다. 그래서 그런지 세자가 알아보지 못하였을 때는 조금 괘씸하기도 했지만 성장통을 빨리 겪어 많이 변한 생김에 우쭐한 심정이었다.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세자와 달리 사내답다 훤칠한 미남자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눈높이 가 같았던 그 옛날보다 내려다볼 수 있는 시선은 사내들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다. 이미 태자와 세자의 신분이라는 차가 휠씬 더 컸지만 외향에 한참 관심이 많을 시기였다.
“전하 아뢸까요?”
“쉬-”
꺼지지 않은 불빛을 따라 걷다 보니 보니 어느새 저수궁 궁문 앞이었다. 훤하게 밝혀진 궁안을 들여다보니 뜰을 지키는 인영 하나 없는 것이 고요했다. 등불은 켜져 있었지만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다리가 저려왔다. 육경궁에서 저수궁까지는 제법 멀었다. 춥기도 추웠다.
“전하 아뢰지 말라 하셔 놓고 지금”
“시끄럽다”
그래 내가 못 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이냐 찰나의 고민이 무색하게 궁문을 넘어섬과 동시에 소소문의 징징거림이 귀에 박혔다. 가끔씩 보면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의문이었다. 조용히 따르는 욱과 명과 달리 소소문은 입만 다물면 완벽했다.
얼마나 괴로우시면 눈을 안 뜨실까
누이, 눈 좀 붙여요 내가 마마 곁에 있을게요
흑..우리 마마 면부가 아주 수척해지신 게 야위셔가지고...흐으
그리 울면 마마께서 어찌 편하게 일어나시겠소
침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지 창이 어른어른한 걸로 보아 세자의 궁인들이 잠도 들지 못한 채 지키고 있는듯했다. 당당하게 궁문을 넘어섰지만 울음소리와 함께 침체된 분위기에 괜히 그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불편한 것이 걸음을 옮겨야 할 것만 같았다.
잠깐만, 해야 할 것 같아.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물그릇을 들고 나오던 금홍과 그대로 마주쳤다. 말소리가 끊기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해 몸을 숨기지도 못하고 문 밖에서 몰래 안을 훔쳐보는 듯한 모양새에 괜스레 소소문만 노려봤다. 빨리 고했으면 이리 모양새가 없진 않았을 텐데 하여간 물색없는 게 굼뜨기까지
“아, 크흠 세자는 깨어났느냐?”
“아직...미령 하시나이다”
묘하게 불퉁한듯한 목소리였다. 저수궁의 궁인들은 탐탁지 않을 방문이었을 테다. 온 이상 가기도 뭣해 서있으니 들라는 말도 없는 게 괘씸하였다.
“세자를 봐야겠다”
“아직 의식이....”
금홍의 탐탁지 않은 말을 무시하며 문을 넘어섰다.
침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궁인들이 들어서는 이에 놀라 무릎을 꿇고 태자에게 예를 올렸다. 작은 소란이 일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일어나라. 열거라”
당황한 궁인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어찌나 부산스러운지 아픈 이 가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곁에 있던 궁인이 눈치껏 문을 열었다. 눈에 거슬리던 이 가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세자의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이 아주 애틋하기가 그지없었다. 아직도 열이 떨어지지 않은 것인지 볼이 발간 것이 더운기를 머금고 있었다.
“누이, 내가 마마의...!”
“태의는 들었더냐”
“태자 전하를”
“되었다, 맥은 짚었느냐”
예를 물리고 다가서는 태자가 낯설어 당황한 낯빛을 숨길수가 없었다. 야장의 차림의 한껏 풀어진 태자의 모습은 오히려 더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 주군인 세자와는 전혀 달라 더 낯설었다. 또래들 사이에선 제법 풍채도 크고 힘이 좋아 훗날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의 운검이 될 것이라고 모두가 그랬다. 근데 천의 태자를 볼 때면 꼭 저가 나약하고 쓸모가 없는 이가 된 것만 같은 초라함에 자존심이 상했다. 신분의 차가 아닌 태자의 기가 주는 느낌이 그랬다.
“네 놈도 아픈 것이냐 저수궁 것들은 어찌 이리 느려 터졌는지, 소소문!”
“예 태자 전하”
“태의를 불러라”
“예? 지..지금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물에 불린 떡마냥 저리 퉁퉁 불어있는데 태의가 필시 맥을 잘못짚었다”
겨우 눈 한번 뜨고 인사불성인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건만 면전에 대고 떡이라고 하는 저 심보를 어찌해야 하는지
이미 모두 잠에 들 시각에 허겁지겁 불려 온 태의는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태자의 흉흉한 눈빛을 받으며 열 오른 세자의 옥체에 침을 놓았다. 상한이 든 몸은 열을 내려야 한다며 침의 까지 모두 벗겨 놓았었는데 기수를 젖힐 때부터 서늘한 삼백안이 따라붙어 팔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고 엄색하신 심기에 목구멍이 조여왔다.
“........침의는,입어도 되지 않는가?”
“전...전하 그것이..”
“아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게”
숨 막힐듯한 정적과 사나운 공기에 무슨 정신으로 요치를 하였는지 침통을 끌어안고 궁을 벗어나서야 제대로 콧구멍으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워낙에 냉정하시고 찬바람이 부는 성정이시긴 하지만 오금이 저린 싸늘한 기운 때문에 모골이 송연한 게 연의 세자가 계속해서 자리보전한다면 제 목숨줄이 위험할 것만 같아 성심을 다해 침을 놓았지만 기력이 부족한 세자의 눈이 떠지는 일은 생기지가 않았다.
삼시세끼 호의호식하며 부러울 것 없이 자란 왕자의 육신 치고는 마르고 선이 가는 몸이 눈에 거슬렸다. 열이 서서히 내려가는지 추위를 느끼는 몸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얼굴도 하얗다 느꼈지만 벗겨놓은 몸을 보니 더 하얬다. 하얗다 못해 뽀얗게 느껴지는 살이 겨울이면 설국으로 변하는 천해국의 눈처럼 티 없이 맑아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침소 안에 아무도 없는데 괜스레 눈치가 보여 문쪽을 한 번 보다 침상 곁에 앉았다. 괴로운지 잔뜩 찌푸린 미간과 열을 내뿜는 통통한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흐느낌이 안쓰러웠다. 분명 연을 생각할 때마다 속이 들끓고 피가 거꾸로 치솟는 감정에 연의 세자를 볼 때마다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증오가 가득한 이 불덩이 같은 마음을 감춰야 하는지 고민했던 날이 무색하게 지난날의 그리움이 더 커서 그런지 마음이 쓰였다. 늘어져있는 팔목을 슬쩍 건드려보니 보드라운 살결에 괜히 심기가 어지러워 기수잇을 끌어다 목 끝까지 덮어버렸다.
이미 세자를 천으로 불러들이는 것부터 황제께서 힘을 많이 쓰셨는데 그것도 모자라 태자비 자리를 내어 달라하니 어이가 없으신지 황후께 고자질을 해버려 불려 가서 어찌나 꾸짖음을 당했는지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치지 말라 하시며 황제께 청한 청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며 잘라내는 일갈에도 처음으로 고집을 부렸다. 어마마마께서 받은 고통 아픔 잊지 못한다고 매일이 지옥이고 악몽인 현실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다고 증오라는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가슴은 텅 빈 것처럼 괴롭다고 하니 잔뜩 일그러지시는 면부에도 어린아이 투정처럼 멈추지 못하고 쏟아내 버렸었다. 금기禁忌, 그것은 서로에게 암묵적인 금기였다. 입 밖으로 올리는 것 자체가 이미 패륜이었지만 이 날만을 기다린 소자를 위해서 힘을 실어달라 빌고 또 설득했다.
“....흐으...마마”
새어 나오는 울음과 눈물이 발걸음을 잡았다. 몸만 훌쩍 컸지 어린아이처럼 어미를 찾는 것은 여전하였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주며 조금은 어색한 손길로 달래어봐도 울려만 봤지 의식도 없이 우는 이를 달래 본 적은, 참 손이 많이 가는 이였다. 유난히 투박해 보이는 손길은 다독여준다는 느낌보단 잠을 깨우는 듯해 보였지만 태자의 면부도 열이 옮은 듯 붉어보였다.
“......아”
나부끼는 꽃잎처럼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며 물기를 잔뜩 머금은 까만 눈동자가 눈을 맞춰왔다.
“괜찮으냐, 정신이 들어?”
투박했지만 따뜻한 손길이었는데 어마마마의 것보단 아바마마가 생각나는 온기였다.
사위가 어두운 것이 아직 밤인듯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이가 태자여서 당혹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마에 올라와 있는 손이 위로와 온기를 나누어주던 손인 것에 더 놀랐지만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이마에 올려진 손으로 가벼이 머리칼을 쓰담아 주는데 조심스러운 그 손길이 조금 부끄러웠다.
“어.....국이는..어찌”
열 때문에 부은 낯을 하고서도 또 그놈의 궁인 놈부터 찾는 모양새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태자의 낮은 한숨에 동그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사흘을 꼬박 잠들었었소, 그리 나약해서 어디 장차 나라를 이끌 수나 있겠소?”
어찌 저리 신경 긁는 소리만 골라 잘하는지 누워있는데도 머리가 핑 도는 것이 열이 받아 화가 오르는 것 같았다.
“그대의 궁인들은 모두 살아는, 있으니 걱정 말게”
웃는 낯인지 화가 어린 낯인지 잘 보이지가 않아서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분명 아까까지는 안신에 웃음이 서렸었는데 다시 내려보는 시선은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 감을 잡지 못하였다. 냉정한 성정과는 달리 훤칠하고 창연한 면부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미편한데...침소 안에 아무도 없어 더 난처하였다. 태자가 손수 구병救病 하였을리는 만무하고 퍽이나 다정한 손길이 첫날 보았던 안하무인 하던 이가 맞는지 의문이었다. 야장의 차림과 풀어헤친 머리카락에 대충 쓴 초관楚冠까지 편안해 보이는 복색도 모두 낯설어 눈 맞춤도 불편하였다. 대면한 첫 만남부터 연을 무시하고 저를 싫어하는 행태가 확실하니 어떠한 태도로 태자를 대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앞으로는 아랫것들 보는 앞에서 무릎 꿇지 말게, 그대 때문에 내 아까운 궁인들만 죽어났지 뭔가”
“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과인寡人을 위해서가 아닌 것에 한 번만 더 무릎을 꿇으면 그땐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제가 듣고 있는 말들이 대관절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혼절할 것만 같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황제폐하의 위신과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대의 위신인 듯 온전할까, 볼모로 끌려왔지만 이 황궁에 들어온 이상 품위는 유지하여야지 안 그렇소?”
손안에 잡히는 기수잇을 꽉 쥐어봐도 몸이 떨려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궁인을,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태자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길가에 지나는 벌레를 죽인 것 마냥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태자의 성정이 잔인해 신물이 올라왔다. 왜 자꾸만 저를 괴롭게 하는지 권력 앞에선 약자였지만 동년배인 태자가 잘 보살펴줄 것이라던 황제폐하의 말씀은 허언이신 듯했다. 연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말려 죽일 셈인 건지 아님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부른 것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대의 아비가 이야기하지 않던가, 무조건 태자 편에 서라고”
하얗게 질린 낯빛이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하는데 속이 들끓었다. 또다시 가학심이 일었다. 사흘을 누워있다 일어나니 기력이 없을 테지 앉아있는 것도 힘겨워보일만큼 지쳐 보였지만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에 점점 벌어지는 동그란 눈동자가 자꾸만 괴롭히고 싶게 만들었다.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짖으라면 짖는 게 개犬들이 하는 일 아닌가 주인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음뿐이니, 가만히 예쁘게 어여쁨만 받다가 온전히 돌아가야지 아니 그렇소”
달처럼 훤한 낯으로 내뱉는 옥음이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연을 아니 제 존재 자체를 가축에다 비유하는 태자의 성정에 치가 떨려왔다. 도대체 아바마마께서 무슨 연유로 태자에게 충성을 맹세를 했는지 아니 개보다도 못하다는 이 처우가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태자 전하, 를 도와 보필하라 하셨지 소인이 내명부에 배속되어 첩지를 받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천자께서 허락하신 일에 세자가 법도를 운운할 일은 아니오”
“허나, 소인 사내 된 몸으로 그 청을 받아들이기 어렵사옵니다”
“그렇소? 이건 청이 아니라 명령이오.
아직은 살아있는 그대 궁인들도 선택지에 넣도록 하지 그대에게 선택지는 단 두 가지 오,
이대로 죽던가 아님 나와 혼인을 하던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욱, 과인의 검을 가져오라”
소리도 없이 침전 안으로 들어서는 태자의 운검은 태자의 발치에 부복을 하며 검을 내밀었다. 활짝 열린 침전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금홍과 어린 궁녀들 그리고 정국의 낯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문 앞에 무릎이 꿇린 채로 태자의 태감과 호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침상 곁에 서있던 태자는 운검에게서 건네받은 검의 칼자루를 천천히 빼들었다.
“자, 그때 이미 한 번의 기회는 줬으니 두 번은 없소. 핏덩이 같은 저 궁녀부터 먼저 보내면 되겠소?”
태자의 칼끝이 젖살이 봉긋한 어린 나인 아이를 향했다. 두려움이 가득한 낯은 눈물이 가득했지만 울음이 새어 나오진 않았다. 생각시 시절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터라 이미 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철저하게 세자의 사람들이었다.
“어찌,어찌 이리도.... 잔인하십니까,
그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목숨을 거두시려 하십니까 주인 잘못 만난 죄밖에 없거늘 차라리 소인 소인....목숨 걷어가시지요”
“그리하면 재미가 없지 않소”
피가 몰려 붉어진 낯과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올려다보는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미 시작된 장기판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선 전력을 다해야 했다. 장기 말은 준비가 됐으니 판을 모조리 뒤엎고 궁將장을 처단해 제자리로 돌려놔야 했다. 변수는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었고 그중에 연의 세자는 한낱 졸卒일 뿐이지만 또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눈을 뜨지 않는 것이 나았을까 눈 앞에 닥친 현실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도 가지 않았다. 사흘 전과 마찬가지로 힘없는 아이들을 인질로 삼아 겁박하는 태자가 무서웠다. 창연하고 빛나는 면부가 미편하고
또 미편했다. 국가 간의 세력은 키울 수 있다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정상적인 혼인이 이루어졌을 때의 경우이고 공주도 아닌 후계도 이을 수 없는 사내와 저와 혼인을 하겠다는 태자의 수를 아무리 생각해도 읽을 수가 없었다.
“세자를 따라 이 먼 타지까지 끌려온 이들이 참으로 가엽지 않은가 허니, 나와 혼인하여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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