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장.

불이不二




“전하 소자가 가겠사옵니다”


대전 안은 숨 막히는 듯한 정적만 흘렀다. 설전이 오가던 대신들도 답이 나지 않는 고요함에 깊은 한숨만 토해냈다. 청룡포를 입고 단정하게 앉아있는 담담한 세자의 모습에 고관대작들의 고개가 바닥에 닿을 듯 울분을 삼켜내며 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되옵니다”
“세자는 조용히 하거라”


가슴이 시리고 온 몸이 떨려 두려움에 잠식될 것 같았지만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후손으로써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안위에 극악무도한 천해국 황제의 칙령은 잔혹할 따름이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천해국으로 보내는 조공의 양이 늘어나고 있었다. 조세 공납 역이 늘어남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에 힘들어지는 것은 오롯이 백성들의 몫이었다. 공녀라는 허울뿐인 이름으로 천해국에서 모진 수난을 겪고 있는 어린 낭자들이 견디지 못해 자진을 한다는 소문이 점점 무성해지더니 보름 전 국경 근처에 버려진 시신들에 이조 좌랑 김 제남의 차녀가 발견이 되어 공분을 사게 되어 일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천해국과의 관계가 공론화되면서 궁 안팎으로 시끄러워진 것은 당연했다. 고관대작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대전 앞마당을 밀고 들어온 유생들의 권당에 임금의 결정이 어전御前 앞으로 다가온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군신지의君臣之義나 다름없는 천해국과의 관계를 형제지맹兄弟之盟으로 바꾸고 세폐 규모도 크게 줄여 줄 것이며 공녀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천해국이 내건 조건은 거부할 수 없게 좋은 조건이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금 세자 저하를 보내지 않으시면 군신지의도 위태로워 천해국에서 더 큰 요구 조건을 내세울게 분명하며 그들이 언제 또다시 침략을 해 올지 모를 일이옵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금 세자 저하를 보내시면 주상 전하의 권위는 물론 우리 연璉의 존폐가 위험하옵니다. 국내의 일대 혁신하여 자강을 토대로 나라를 지키고 신新국과 협력하여 군사의 힘을 길러 되갚아 주심이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이보시오 대감 군사의 힘이 하루아침에 길러진답니까 훗날 대의를 위해 잠깐 아주 잠깐 그 본질을 지키는 것이 그리 어렵소. 이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일단 천 국의 요구를 들어준 다음 힘을 길러야지 않겠소”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조판서 남 상규와 무력으로 강력하게 응징해 명분을 세워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 세건 파로 나뉘어 하루가 멀다 하고 맞서기 바빴다.


“그만들 하시오! 그만, 대책 없이 우리끼리 싸운다고 될 일이오 이게, 나라의 앞 날이 풍전등화인 지금 힘을 합하여도 모자란 때이거늘 그대들은 어찌 그리 목청만 높이면 그만인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백여 년 전 연은 천해국의 제후국으로 천국과의 전쟁에 패해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항복해 천의 내정 간섭으로 자주성을 잃은 지 오래였었다. 먼저 연국의 왕은 천해국의 공주와 국혼을 올려 연을 부마국으로 만들었고 그 사이의 태어난 왕자를 천해국에서 나고 자라게 하여 대 천해국의 위엄과 충심을 받드는 지배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런데 작금의 천의 황제 도경제는 연의 세자인 민을 천해국으로 부르지 아니하였고 또한 연의 임금인 윤이 천해국의 공주가 아닌 연의 사대부가 여식인 홍문관 대제학 심준명의 딸과 혼례를 치르는 것까지 허하여주었었다.
그래서 더더욱 천의 황제의 칙령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연의 임금인 윤이 천해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도경제가 윤을 친 아우처럼 생각해 베푼 자비였건만 무릇 인간의 본성이란 자비를 베풀면
욕심은 끝이 없기 마련이었다.


풍년이라며 백성들 모두가 웃음꽃이 핀 그 해
성서로운 기운이 맴돌고 꽃향기가 가득한 그 날 지민智旻의 탄생은 모두에게 축복이었다.
소경왕후 심씨가 몸이 약해 어렵게 얻은 귀한 아이였다. 연국의 유일한 왕후 소생인 지민은 곧 지학에 접어들며 왕실의 어여쁨과 귀애貴愛를 듬뿍 받고 자란 이로 탄생과 동시에 원자元子가 되었고 천지분간 못하고 망아지 같던 시절을 거쳐 충년沖年이 되던 해 세자로 책봉되어 장차 왕위를 이어받을 준비로 성균관에 입학례를 치르고 시강원에 세자부世子傅 김 유의 가르침을 받으며 훗날 총명하고 현명하게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모든 이들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 중인 아직은 어린 왕세자였다.



“저하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아니...”
“수라도 물리시고 이러다 예후가 상하실까 걱정이어요”


워낙에 자유분방하고 호기심이 많아 예학睿學보다는 밖으로 도는걸 더 즐겨했다. 그리 어린아이처럼 굴던 세자가 충년이 되던 해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며 뭐든지 혼자 하려고 하며 예덕睿德과 예질睿質을 바르게 해야 한다며 하루 열두 번도 더 오락가락하는 성정에도 동궁의 식솔들은 그런 세자가 가여워 더 품어주기 바빴다. 시강원에 들기 싫어 배앓이를 한다며 꾀병을 부려도 동궁 나인 정이의 여분 궁녀복을 훔쳐 환복하고 정국과 궁 밖으로 나가 날이 저물 때까지 놀다 들어온 날이 샐 수 없을 정도여도 심성이 착하고 마음이 여린 세자를 모두가 귀애했다.


“저하, 국이랑 저자라도 다녀오시지요”


침전에 틀어박혀 자리보전한 세자의 뒷모습을 보며 금홍이 부러 달래듯이 물어봐도 끌어안은 기수를 더 당겨 덮더니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선희 옹주가 태어난 후엔 오라비는 듬직해야 한다며 주상전하께 혼이 나도 좀처럼 울지 않더니 꼭 곁에 누군가 없을 때 비로소 혼자가 됐을 때 기수 속에 숨어 눈물을 보이곤 했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건네어도 세자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조용히 침전을 물러섰다. 문 밖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걱정 어린 동궁전 식구들의 시선에 금홍이 말없이 고개를 저으니 다들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내년이면 지학에 접어들어 가례도감이 설치되며 곧 세자비를 맞이해 왕가의 일원으로 입지를 탄탄히 다 질 일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날아든 천의 황제의 칙령에 하루하루 시름에 잠겨있는 세자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약관弱冠이 될 때까지 천으로의 유학을 허한다는 황제의 칙령이 대전에 모였던 대소 신료들의 귀에 들어가자마자 소경 왕후께서 몸져누우심과 동시에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는 연의 왕의 노력에도 확고한 도경제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미로 황제의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보내옴으로써 무조건적으로 세자를 천해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연왕에게 은밀히 전해진 도경제의 서신에 더더욱이나 거부할 수가 없었다.
지금 천해국의 정세를 세세하게 적은 도경제의 서신은 한 나라의 황제가 아닌 아비의 마음이었다.



도경제는 전 황제인 부룡제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강건해 모두가 다음 황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황후의 자식이 아닌 출신이 미천한 어미가 걸림돌이었다. 부룡제의 욕심이 화를 불렀다. 황국의 더 나은 인재를 위해 황자들의 경쟁을 부추겨 황위를 약속하지 않았고 장자인 도경제에게도 황위 세습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안 그래도 입지가 좁은 도경제를 부추기며 한계로 몰아갔고 그 결과로 부룡제 21년 황자의 난 이 일어났다.
매일이 살얼음판인 황궁의 정세에 목숨을 위협받는 1 황자는 황실의 모두가 적이었다. 온순하고 유순하던 1황자의 핏빛 정쟁의 서막이었다.
부룡제를 심신이 미약하여 국정을 돌볼 수 없다 하여 폐출하고 나머지 형제들의 숙청이 시작되었었다.
황족의 정치 개입을 막아 철저하게 황제의 지배 아래 황권을 강화할 수 있도록 황족의 씨를 말려버렸었다. 그렇게 모든 걸림돌을 제거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한 뒤 빠르게 내정을 다스리고 민심의 안정을 꾀했다. 신분 고하 막론하고 공명정대한 그의 지배능력은 무지한 백성들은 민심을 다독여주고 어진 황제에게 충심을 다했고 난을 철저하게 감추고 황제로 등극한 도경제는 훗날 자신의 후손은 이러한 일을 겪지 않도록 집안 좋은 여식을 황후로 맞아 혈통 좋은 황자를 생산하였고 그 아이가 지금 대천해국의 황태자인 태泰였다.
정쟁이 싫은 도경제는 집안은 좋되 외척세력을 키울 수 없도록 철저히 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황태자 자리를 약속하며 후계문제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려 했었지만 모든 일이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의 앞날에 나타난 한 여인의 손을 붙잡고 아장아장 막 걸음을 뗀 아이는 천해국의 1황자라고 했다.
태자비도 없었던 도경제의 앞에 조금은 초라하고 수수한 모습의 여인은 기억에도 없는 이였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폐하, 거짓이라니요 소녀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이 아이 태자 전하 아니 황제폐하의 아드님이 맞사옵니다”


곁에서 있던 내각 대학사 손화의 낯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무릎을 꿇었다. 황제에게 옳고 그름을 주청 하는 고문顧問 역할을 하고, 황제의 덕을 보필하며 황제의 비답批答을 초안해 자문을 맡아오던 그는 충신 중에 충신이었으며 도경제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힘을 쓴 최측근이었다. 그런 그가 황제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폐하, 삼 년 전 정월의 어화원 동쪽 만춘정을 기억하십니까 소녀를 품으신 그날”
“닥치거라! 저 년을 당장 끌어내라”
“이거 놓아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느냐, 이 나라 황자를 생산한 이다! 아버님! 무어라 말씀 좀 해보시지요!”


무릎을 꿇은 손화에게 아버지라 함은 그의 여식이라는 소리였다. 손화에겐 아들만 둘이었다.


황제의 최측근의 여식이지만 정실부인이 아닌 첩에서 본 유일한 여식이었다. 그래서 내치지 못하고 곁에 두었던 것이 독으로 돌아온 것 같아 황제께 죄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외척 때문에 먼 길을 돌아왔건만 또다시 환란을 겪어 민심이 흉흉해지면 도경제의 자리도 위태로웠다. 아니 사실 딸과 손자 둘 다 잃고 싶지 않아 끝까지 숨기려 했건만 딸의 숨기지 못하는 야망과 욕심이 결국엔 화를 불러일으킨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대학사, 모두 사실인가”


비답 대신 침묵을 하며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현명하고 영특하신 분이니 이미 모든 걸 통달하고 깨치신 후였다. 태자비를 간택하기 전 종인부宗人府에서 태자의 시침을 들 수 있도록 여덟의 여관을 두었는데 이 여덟 명 중 태자의 씨를 품게 되면 황제의 윤허 아래 태자비가 될수도 있었다. 허나 도경제 그러니까 황태자 시절 과륜은 궁의 여인을 품지 않았었다. 모두 제 형제들의 어미들이 밀어 넣은 여인일 것이 뻔했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제 형제들의 목을 쳐내고 두 손과 육신을 피로 불들인 날이었다. 조롱하던 입을 찢고 제 존재 자체를 비웃던 육신들을 갈갈이 도륙하며 미쳤던 그날 밤 승리에 도취되어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던 그 밤에 붉은 동백이 흐드러지게 핀 어화원 만춘정에서 만난 이였다. 궁녀의 복색도 아닌 비빈의 의대도 아닌 침의 차림에 새하얀 일구종(비단으로 만들어 모피를 덧댄 망토)만 걸친 채였다. 기이하고 묘한 밤이었다. 단 하룻밤, 얼굴도 희미해 꿈인가 싶었던 밤 그 후에 연기처럼 사라진 여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뒤돌아 볼 여유가 없었다.
태자의 자리를 권고히 하기 위해서 방비를 하면 무엇하나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자애롭고 현명한 주황후 덕에 빠르게 내정이 정리가 되었다.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어도 어찌 되었든 황제의 아들이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황후 동가씨
佳氏의 황자 태형泰亨이 황태자에 책봉되는 것은 당연했고 훗날 도경제 황위를 물려받게 될 이는 황태자인 태泰 였지만 현 황국의 정세가 귀비에 봉해진 1황자 선善의 생모인 내각대학사의 딸 손씨 위연違緣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황제의 권력에 맞서 대항할 수 있는 자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 들어갔고 간악하고 사특한 무리들이 안에서부터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세자가 추위를 많이 타오, 신경 써주시게”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자는 천해국으로의 유학길을 오르게 되었다. 아비 된 마음에 행렬이 초라하지 않게 신경을 썼지만 자식을 떼놓고 어찌 두 발을 뻗고 잠을 들 수 있을까 미편한 소경 왕후는 세자의 배웅길도 나서지도 못했다.
부러 씩씩한척하며 웃고 있는 세자의 모습이 더 안쓰러웠다. 추운 겨울에 들어서는 동지섣달에 연璉 보다 더 추운 천해국은 매서운 추위와 한파로 인해 땅이 얼어 스무날이면 충분한 길을 족히 그믐은 걸린다고 들었다. 길고 험난한 여정이 될게 분명했다.
아이 취급이 싫다고 말을 타고 간다는 것도 가는 길에 감모라도 들면 함께 하는 이들이 더 곤할 것이라고 금홍과 정국이 힘이 들것이라 하니 마음 약한 세자는 또 그럼 안된다며 씩씩하게 가마에 올랐다.


“지민아. 아가, 더 큰 세상에서 수학修學 하고 온다고 생각하거라 절대 약한 마음먹어서는 안 될 것이야”


마지막으로 아명을 불러본 것이 언제인지, 작고 여리기만 했던 아기가 연을 위해 나라를 위해 희생한다 하니 마음이 아팠다. 보는 눈이 많아 품에 안을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세자가 된 후론 강하게 키우고 훈육하여야 한다고 더 엄하게 대했지만 그때마다 살가운 성정으로 잘 대처했고 원체 밝고 기운이 넘쳐 주변이들 모두가 세자를 귀애해 그늘지거나 구김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바르게 키웠는데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아껴주고 귀히 여겼건만 정해진 운명은 어찌 이리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 나라의 국운國運이 먼 훗날을 위해 소를 희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나중이 되면 지민도 이해할 것이라 믿고 행 할 수밖에 없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께 동궁에 소자가 놓고 온 것이 있으니 꼭 찾아서 간직하셔야 한다고 전해주셔요 소자가 돌아오면 그때 꼭 돌려주셔야 한다고”
“곤전坤殿에게만 주는 것이냐, 이 아비 것은”
“참, 아바마마는 욕심도 많으십니다. 날이 춥습니다 옥체 상하실까 저어되니 이만 들어가셔요 소자 무탈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내 너무 붙잡아뒀구나 얼른 채비하거라”

찬 바람에 언 볼이 발긋했다. 남바위 턱끈을 여며주며 차가운 볼을 스치듯 쓰담아주니 눈만 댕그랗게 내놓은 모습이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이리 귀여운 것을 머나먼 땅에 보내야 한다니 속이 쓰렸다. 낯이 안 좋은걸 느꼈는지 배시시 웃으며 어수를 붙잡아오는 작은 손이 주는 온기가 마음을 할퀴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것은 김내관이 일러줄 것이 옵니다”

누가들을 새라 속삭이는 목소리도 애틋했다.





“국아, 춥지 않으냐”

채를 올려 밖을 내다보니 바람이 찬 것이 국경에 다다른 것 같았다. 말을 타고 움직이니 그대로 바람을
맞는 이들이 걱정이었다.

“저하, 추우십니까?”
“아니 네가 춥냐고, 날이 많이 차서 다들 걱정이야”
“전 원체 열이 많지 않습니까 걱정 마셔요, 얼른 채를 내리십시오 바람 들어갑니다”

저야 가마 안에서 꽁꽁 싸매고 있지만 정국과 궁녀들은 추울까 입고 있는 것도 다 벗어줄 참이었다. 천해국은 훨씬 춥다며 단단히 방비하라던 천해국의 사신은 춥지도 않은지 건네준 남바위도 마다하고 머리칼 휘날리며 길을 잘도 잡았다. 엿새 정도면 황성에 접어들고 거기서 또 사흘은 더 가야 황궁의 정문인 오문에 당도한다고 하니 연에서 점점 멀어지는 거리에 마음이 휑 한 것이 몸도 헛헛해 괜스레 겉옷을 더 여몄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떠나온 길이기 때문에 나약해지지 않으려 했지만 벌써 연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 생각하면 짧을 오 년을 천해국과 황태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아 훗날 연에 돌아와서 좋은 인재가 되어 국가번영에 힘을 쓰라던 아바마마의 옥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천해국의 사절단으로 왔던 황자를 기억해 내려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연국까지 소문이 자자한 황태자의 미모가. 그때 정국이와 함께 저자에 나간 것을 들켜 벌을 받을까 고민하다 결국 병이 나서 사절단이 머문 내내 동궁 전만 지키느라 떠나는 날 배웅만 간신히 했었다. 이번에 천해국에 가게 되면 황태자인 2황자 태泰에게 밉보여선 아니 된다며 신신당부하던 아바마마는 그때 1황자인 선善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권력에 아부했었다. 어리고 미숙하던 그때는 그게 단순히 예인줄 알았는데 훗날 보니 1황자와 황태자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권력의 무게라는 것을 시일이 흐른 후에나 알게 되었다.


“정국아, 너도 기억 안 나지? 태자 말이야”
“명확히는 잘, 소문으로는 반안潘安(고대미남) 보다 더 미남자라고 하던데요”
“참나, 천해국인들은 허풍이 지나쳐서 믿을 수가 없어”
“투기妬忌 하십니까?”
“투기는 무슨! 분명 부계 조상은 주센인이어서 팔다리도 짧고 땅딸막하고 낯은 둥글넓적할걸 내기할래?”


다정하고 따뜻한 성정을 지녔다고 걱정 말라하셨지만 미남인데 착하기까지 하다는 건 믿을 수가 없었다. 태어난 해가 같다고 들어 잘 챙겨 줄 것이라던 황태자와 1황자 사이의 알력싸움에 절대 휘말리지 말고 무조건 황태자 편에 서라며 신신당부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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