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화양연화_28.5



​*
본격적으로 연말이 시작됐다. 안 그래도 바쁘지만 더 바빠지는 달이었다. 연말 시상식 준비 타 그룹과 합동무대까지 정말 몸이 열개였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로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스케줄이 없는 날은 없었지만 반나절의 자유시간도 연습실에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태형이가 있었다면 숙소에서 같이 영화를 보던가 게임이라도 할 텐데 혼자선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결국엔 또 연습실이었다. 드라마 방영이 다가오면서 또 바빠진 태형인 개인 스케줄 때문에 빠지는 날이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늦어지는 귀가 시간에 형들도 걱정이 되는지 뭐라고 하는 날이 점점 늘었다. 늦어지는 날엔 항상 술을 마시고 들어왔고 그런 형들이 눈치가 보여 꼭 출발할 때 연락을 하라고 했지만 귀찮은 건지 기분이 안 좋은 건지 카톡을 읽고도 연락을 안 할 때가 있어 난감했다. 나에게 서운한 게 있어서 그런가 해서 눈치를 보면 또 다음날엔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치는 걸 보며 너무 힘들어서 지쳐서 그럴 때가 있는 거라며 애써 합리화를 하기도 했다.


"지민아"
"네 형"
"그 태민 씨랑 연습하는 거 일정 조정해야 할 거 같은데 오사카 갔다 오면 그날 바로 맞춰봐야 할 것 같다. 둘이서 맞춰 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없어"
"아 네 알겠어요"
"일단 너 독무만 연습하면 될 거 같다"


몸이 안 따라줘서 멍하니 구석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는데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성득쌤에 괜히 놀라서 몸을 일으켰고 뭔 짓했길래 놀라냐며 웃으며 연말 스케줄 일정을 전해주시고는 나머지 연습을 하라며 자리를 비켜주셨다.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집중이 안돼서 큰일이었다.


포스터 촬영만 하면 금방이라던 태형인 새벽이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내일 또 방송이 있어서 걱정이 된 형들이 아직도 연락이 없냐고 물어봤을 때 왠지 나에겐 연락을 했겠지 하는 뉘앙스에 우리가 지금 조금 이상하다는 걸 느껴버렸다. 한참을 망설이다 핸드폰을 들고 부엌으로 나와서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에 괜히 초조했다.


[여보세요!.....애기님! 여보세요]
"………어……여보세요?"


시끌시끌한 소리와 함께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당황해서 액정을 봐도 태형이에게 건 게 맞는데 아무 말이 없는 나에게 자기소개를 하던 그는 태형이가 몇 번이나 얘기한 조윤우 형이었다. 덩달아서 나도 내 소개를 하며 인사를 하니 상대방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곧이어 들리는 태형이 목소리에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통화는 끊어진 상태였다. 당황한 나는 카톡창을 켰고 태형이의 한 마디에 곤란한 상황이란 걸 눈치를 챘다.


'아 그냥 전화 끊지' 오전 1:50


내 카톡 이후에 답장이 없었지만 걱정하는 형들에겐 곧 올 거라며 얼른 자라고 말을 하면서도 속이 상했다. 피곤하지만 들어오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문소리가 나면 바로 나갈 수 있게 바닥에 누워 핸드폰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고 나를 깨우는 태형이의 손길에 정신이 들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린 큰소리를 안 내려고 그런줄 알았지 그게 화가 났었던 거였는지는 너무 비몽사몽 한 상태여서 몰랐었다. 태형이 방으로 이끌려서 침대에 눕혀질때까지 거의 반 수면 상태였었다. 다음날에 그렇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태형이를 예상했었다면 새벽에 그냥 잠들진 않았을텐데


괜찮다고 씩씩한 척하던 태형인 많이 지쳤는지 전보다 짜증도 늘고 말이 없어졌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얘기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혼자 속으로만 삭히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예민해진 태형이의 눈치를 보느라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깊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여건도 되지 않아 태형이가 괜찮아질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태형이의 시간에서 성장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 고민도 많고 나름대로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잠깐 힘든 것 정도는 꾹 참으려고 했다.


귀국하자마자 연습실로 가야 하는 나에게 태형인 심통을 부리며 다른 날보다 더 툴툴거리며 마찬가지로 가기 싫은 나를 힘들게 했다. 형들이 지민이도 불편하겠다며 적당히 하라고 옆에서 거들어도 계속해서 우리가 떨어져 있는 날이 많아서 서운한 감정이 들어서 그런지 태형이를 밀어낼수가 없었다.


"같이 가면 안되나?"
"난 상관없지만 첫 대면 이잖아. 니 내일 제작발표횐데 가서 좀 쉬어 응? 연습 빨리하고 올게"
"그러면 화장실 한 번 들렀다 가까?"


전쟁 중에도 사랑은 싹이 튼다지만 생일 이후로 제대로 된 스킨십을 못해 태형이나 나나 몸이 달아서 은연중에 계속 껴안고 터치하는 그런 불상사가 계속 반복이었다. 방송에서 사심 가득한 스킨십 때문에 형들조차 말리지 못해 언제고 사고 한번 날것이라며 불안해했다.


"지민아! 빨리 출발하자"
"태태 나 빨리 갔다 올게. 쉬고 있어"


붙잡은 손을 한 번 꽉 잡아주고 기다리고 있는 매니저형쪽으로 향했다. 아쉬움에 뒤돌아서 손을 흔들자 잔뜩 불퉁한 얼굴로 똑같이 손을 흔들어주는 태형이가 귀여워서 손가락으로 작게 마음을 표현했다.




새벽녘까지 이어진 연습에 결국엔 곧 해가 뜰 시간에 귀가했다. 연습 중간중간에 계속해서 카톡이 오는 태형이의 연락에도 눈치가 보여서 늦은 답장을 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일주일 동안 나는 현대무용 무대도 연습을 해야 했고 태민이 형과 함께 하는 합동무대까지 몰아서 준비를 해야 해서 우리 연습이 끝나면 바로 이동해서 매일이 연습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벌써 며칠째인지 날짜 감각도 없었다. 제작발표회까지 끝나고 나니 이제 진짜 여유가 생긴 태형인 숙소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만큼 연락 오는 시간이 잦아졌다. 하지만 나는 안무 연습을 해야 하니 핸드폰을 볼 수가 없었다. 며칠 사이에 우리 사이가 뒤바껴버렸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불 꺼진 조용한 숙소에 들어와서도 태형이 방문을 여는 게 먼저였다.


"지민아"
"안 잤어?"
"니 안 왔는데 어떻게 자노"
"니 지금까지 게임하는데 남준이 형 뭐라 안 했나?"
"당근 혼났지"


혹시나 잘까 살며시 방문을 연게 무색할 만큼 말똥말똥한 눈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태형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날 기다린다는 명목을 내세워 그동안 밀린 게임 하느라 신난 태형인 매일 밤을 새워 게임을 했고 그러면서 괴로운 건 한 방 쓰는 남준이 형이었다.


"이제 그만하고 얼른 자. 난 씻을게"


이미 코 고는 소리는 들렸지만 우리 대화 소리에 혹시나 남준이 형 잠이 깰까 봐 얼른 문을 닫으려고 했다. 갑자기 책상에서 벌떡 일어난 태형이 때문에 조용한 방 안에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고 우리 둘 다 깜짝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놀래라"


더 소곤거리는 소리로 남준이 형 방 쪽을 한 번 보고 얼른 나가려고 했는데 어느새 코 앞으로 다가온 태형이가 어깨를 붙잡아 왔다. 컴퓨터의 희미한 빛에 겨우 얼굴은 보였지만 등지고 있는 태형이 얼굴은 잘 보이지가 않았다. 내 어깨를 붙잡은 손을 뒤로 힘줘서 밀어내는 바람에 뒤로 밀려났다. 더 희미해진 불빛은 복도에 길게 선을 내며 비추고 있었다.


"흡 나...땀냄새"
"괜찮아 아 살 것 같다"


어깨를 꽉 끌어안는 손길에 놀라서 몸을 뒤로 물렸지만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태형이의 온기에 팔을 들어서 허리를 마주 끌어안았다. 깜깜한 복도에서 틈도 없이 맞댄 몸을 끌어안고 있으니 아무도 없는 세상에 둘만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몽롱하고 발밑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 말하지않아도 태형이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서로의 체온이 필요하고 내 어깨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근데 얼렁뚱땅 넘어갈라고 하지 마라. 약속은 약속인 거 알제? 이제 스쿼트는 없다"
"니 너무 잔인하다. 박지민도 없고 게임도 못하게 하는 건"



새벽의 마법이었는지 그 이후에 또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난 여전히 매일 연습하느라 하루하루가 바빴고 어마어마한 연습 양에 딴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만 갈 수 있는 길에 옆도 뒤도 돌아볼수 없는 상황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이 스트레스로 돌아와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어떤 것들 때문에 조금 지치기 시작했다. 아마 태형이도 지금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나는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있고 동기가 있다면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면서까지 이겨내는 스타일이라면 태형인 그걸 해소하는 방법이 나완 정반대였다. 다만 알고있으면서 그것조차 나에겐 스트레스였으니 태형이가 주는 영향이 나에겐 너무나도 컸다.





불 꺼진 숙소에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소파에서 느껴지는 인영에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괜히 제 발 저린다고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너무 깜깜해서 소파의 인영이 누구인 줄 몰라서 핸드폰을 켜며 정국이냐고 물었고 낮은 한숨과 함께 들리는 목소리에 더 긴장이 됐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까 끝났다매"
"어? 아 안 잤나? 그 태민이 형이랑 얘기 좀 하다 온다고"


잔뜩 가라앉은 태형이의 목소리에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만 불안해서 소파로 더 다가서지 못했다.


"어디 갔다 왔어?"
"어? 아니 연습실에서 그냥"
"연습실...그래...연습실에 있었어?"
"응 그 태민이 형네 연습실에 있었지"


표정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태형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매일 연습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다른 날과는 다른 태형이의 태도에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나 일단 씻고 올게. 아 아님 먼저 자"


소파에 앉아있는 태형이 앞을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얘기했고 거실 끝에 다다라서야 대답이 없는 태형이가 이상해 고개를 돌리니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


"지민아, 진짜 연습실에 있다가 온 거 맞나?"
"응 연습 끝나고 온 거라니까. 내가 지금 놀다 들어오겠나?"
"니 연습은 1시에 끝났다매 지금 3시...하 4시네 근데 이 시간까지 얘기하다 왔다고? 화 안 낼 테니까 그냥 사실대로 얘기해라"
"태민이 형이랑 얘기하다 왔다니까 태태 나 너무 피곤해 내일 얘기하자. 태형아 내 지금 약간 짜증 날라한다"
"나도 지금 짜증 나니까 빨리 말해라"


점점 격양되는 목소리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추궁하듯이 따지고 드는 태형이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 더 가면 진짜 큰소리 나면서 싸울 것 같아서 한숨을 한번 쉬고 등을 돌리려 했더니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에 정말 화가 났다.


"그만하자 태형아. 내가 언제 니 늦게 들어온다고 뭐라 했나? 친구들이랑 여행가도 내가 뭐라고 했냐고! 내가 뭐 딴짓하다 온 사람처럼 왜 그렇게 말하는데? 니는 내 못 믿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얘기해?"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왜 말을 못 하냐고? 니가 이러니까 더 이상하잖아!"
"니 진짜! 그만하자고"
"왜 최현이 비밀로 하고 만나자 하드나?"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이름에 놀라서 맥이 탁 풀려버렸다. 계속해서 왜 늦었냐고 진짜 연습실에 있었냐고 물어오는 게 이상했다. 뭔가 알고 있으면서 왜 늦었는지 알고서 물어오는 모습에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허 와- 니 지금 떠본 거야?"
"하! 진짜 최현이랑 있었나 보네"
"김태형!"
"뭐했는데 이 시간까지? 아니 말 못 할 이유가 뭔데
왜 그 새끼랑 잤나?"


서늘한 시선으로 물어오는 태형이에게 서러운 마음이 듬과 동시에 내가 그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맞는 건지 착각이 들 정도로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냉정한 마음이 들었다.


"니 눈엔 내가 그 정도밖에 안되나 보네.
하아...그냥 니가 생각하고 싶은데로 생각해"
"그래 그러면 니 그 옷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 냄새는"


거실 스위치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불은 키고는 내 윗옷을 똑바로 바라보는 태형이의 시선이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이거는...."
"왜 연습실에서 샤워하고 왔다고? 니가? 남의 연습실에서? 하 왜
거짓말하는데! 왜!"


너무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이 먼저였다. 과연 사실대로 얘기한다고 해서 태형이가 믿을까 했던 안일한 생각 때문에 겁이 나서 거짓말을 한 게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들어 속에서부터 터진 설움이 밖으로 새어 나올까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어도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또 우나?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니가 왜 우는데!"
"태형아..하아...그게 아니라"


마찬가지로 눈가가 빨개진 채로 이를 악물고 나에게 다그치던 태형이에게 다가서자 바로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미처 닿지 못한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싸늘하면서 잔뜩 허탈한 표정으로 태형이가 힘없이 돌아섰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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