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화양연화_04
[뷔민]화양연화_04
또 혼자 고한 이별에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 날 밤에도 밤새 토했다. 몸은 너무 괴로웠지만 마음은 내려놓으니 오히려 평온했다.
여느날과 다름 없는 하루였고 공백기가 무색하게 스케줄에 치이는 하루이기도 한 오늘인데 내가 지금 피곤해서 헛소리를 들은건지 아님 뜬구름 같은 헛소문으로 치부해야하는건지 혼란스러웠다.
"이미 최정상의 위치한 인기아이돌 C그룹의 멤버 A군이 게이설에 휩싸였습니다. 잘생긴 외모와 훤칠한 키로 배우로서도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가상승중인 그가 사실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태원의 한 게이클럽에서 목격된 그는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으며 뭇 남성들과 어울리며 애정행각을 서슴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 동안 스캔들 한번 없이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A군, 여자 연예인들의 이상형으로 손꼽히는 그가 은밀한 성적취향을 가졌다해서 많은 여자 연예인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인기아이돌A군 이면 누구지? A로 시작하면 이씨 인건가?"
밀린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녹초가 돼있던 멤버들도 귀가 솔깃하는 가십거리에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연신 석진이형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글을 읽어주는 정국이와 온갖 추측을 하며 누군지 궁금해죽겠다며 징징대는 호석이형 옆에서 멍하니 있던 나는 문득 그가 생각났다.
"아, 형-그냥 이니셜이잖아요.이니셜"
"참나, 이니셜할거면 찌라시를 왜 쓰냐고"
추석특집으로 나갈 아육대 촬영으로 체육관에 갇힌지 8시간이 다 되어갈때쯤 석진이형이 가져온 찌라시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무기력하게 구석에 있던 윤기형까지 일으켰다. 저녁까지 강행군에 녹초가 된 나머지 형들은 밥을 먹자마자 누울수 있는 구석을 찾아 사라졌고 태형은 이미 밥을 먹기전 부터 사라진지 오래였다.
"음...댓글보니 빅뱅선배님들이랑 비..스트 기- 선배님이라면서 나뉘었는데요"
"야야. 비스트 선배님들 들을까 무섭다. 쉬쉬"
"그건 팬덤끼리 싸움아니냐?"
윤기형까지 껴서 네명이 둘러앉아 하는 이야기가 게이 찌라시라니. 가십거리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은 연예인들의 오랜 숙명과도 같아서 그들이 고통받고 우리가 그 고통을 함께 겪고 있음에도 호기심 앞에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것 같았다.
"에, 최현?....어..엊그제 이태원에서 봤다는 댓글에 난리 났는데요"
"최현?"
나도 모르는 사이 입밖으로 그의 이름이 흘러나온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태형이 자리에 없음에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혹시나 주변을 살폈다.
"펄스에서 최현선배님이랑 이주훈, 모델 이신이랑 같이 있는거 봤다는데요"
"대박-팩트구만. 헐 최현선배 얼굴 아깝다"
최현이 게이인게 기정 사실이 된것처럼 감정이입을 해서 토론을 하는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그가 뭐라고 했더라....친한동생 생일파티를 갔었다고 그게 클럽이라고 했었나. 아, 이태원은 확실했는데...
어제 그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었다. 그의 집에 갔었던 그날 이후 해외스케줄로 인해서 그에게 제대로된 사과와 감사를 표현하지 못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었고 내내 걱정만하다 귀국하자마자 전화를 하니 우려했던 상황과 다르게 아무렇지않게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가는 그때문에 또 시답잖은 얘기를하고 시간가는줄 모르고 수다를 떨어댔었다. 한참만에 잔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아프냐고 묻던 내 물음에 낮게 웃으며 어제 너무 달려서 술을 너무 마셔서 몸이 맛이갔다는 그의 대답에 깔깔 웃으며 형님, 너무 늙어서 무리하시면 안된다며 놀려대던게 생각이 났다.
".....민이형..지민이형!"
"어...어?!"
"뭔생각해요?..넋이 나갔어요!"
"넘 충격먹었냐, 최현선배 게이인게"
"아뇨! 제가 왜요!"
"오히려 잘된거 아냐? 희망이 생겼네. 너 최현선배님 좋아하잖아"
"아,형! 뭔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너무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윤기형에게 소리를 지르다시피한 나를 바라보는 셋의 표정을 보니...아,내가 너무 오버했구나.
윤기형의 미간에 잡히는 주름이 깊어지려해서 얼굴을 손으로가리며 왜 잘생긴 사람들은 다 게이냐며 과장되게 우는척을 했다. 너무 어색하기 그지 없는 연기였지만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었다.
"걱정마, 지민아 너는 해당사항 없으니까. 넌 저기 끼지도 못하겠다. 키부터 땡인디"
"아! 행님!"
호석이형의 한마디에 정국이가 제일 크게 웃으며 수긍하는게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남자들답게 오래가지 못하는 집중력에 또 각자플레이에 들어간 형들 때문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너무 더워 바깥에서 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어서 움직이기 귀찮았지만 계속 있다간 표정관리가 안될 것 같아서 나왔다.
왜 하필 최현인지.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그가 커밍아웃을 한 것도 아니지만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딱 그 짝이었다. 태형일 좋아하지만 남자를 이성으로 좋아해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거부감까진 아니지만 또 호의적이지도 않은 나는 그 동안의 그의 행동을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후배에 대한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나.
피곤할텐데 공연 끝나고 오면 보자던 그에게 오지랖 넓게 일본을 가기전까지 꽉 찬 스케줄에도 꼭 만나자고 맛있는거 사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당장 낼 모레인데....그를 만나면 티가 날게 분명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에게까지 소문이 난거라면 그도 벌써 소식을 접했을 터였다.
"아!..깜짝이야"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갈뻔한걸 반사적으로 붙잡아오는 태형의 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이고. 지민아, 괜찮아?"
"응, 괜찮아 성재야"
"야, 뭔 문을 그렇게 무식하게 열어. 어디가노?"
성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다 마주친 태형에 지레 놀란 가슴은 진정이 안됐다.
"화장실"
"같이가까?"
"뭘 같이가. 가서 밥이나 무라"
태형이 붙잡고 있는 손을 밀어내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형도 같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혹시 오해라도 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니 괜스레 긴장이 되는게 마음이 진정이 안됐다.
아니, 단순한 태형이 찌라시만으로 연결해서 깊게 생각하지는 않을테지만 만약에 라는 전제가 붙으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멀리까지 가버렸다.
뭐라고 해야하지. 갑자기 스케줄이 생겼다고 할까?
그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울리다보면 찌라시처럼 소문에 휩싸일수도 있고 또 형들도 알게 되고 결국엔 태형이도 알게 돼서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내 마음이 좀먹는게 느껴졌다.
선배든 친구든 만드는게 아니었다. 주변에 챙길 사람이 많아질수록 내 약점도 생긴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태형일 좋아하고 나서부턴 남들이 알아챌까 티가 날까 말을 아끼고 행동도 더 조심했다. 나는 조심한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게 사람 마음이라고.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말 한마디 걸음걸이 하나하나까지 평가 받고 입방아에 오른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며 조심해야 한다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전담해주시는 태성쌤의 한마디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쌓여가는 경력에 해이해지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란 힘들었다. 일단은 이틀 시간이 있으니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기 무섭게 생긴 일에 혼란스러웠지만 결국엔 내가 해결해야하는 일이어서 너무 답답했다.
"야, 뭘 그렇게 생각해?"
어느새 뒤따라온건지 화장실로 들어서는 태형때문에 더이상 그의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새 성재는 어디다가 떨구고 왔는지 혼자 덩그러니 서있는 태형을 보며 밥이나 먹지 왜 따라왔냐며 묻자 성재와 이미 먹었다는 태형의 대답에 이 놈의 오지랖. 괜한 걱정은 안해도 되는데 버릇처럼 또 태형을 챙기는 내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무섭게 이젠 또 왜 웃노?태형이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입을 또 한껏 늘어뜨리며 못생긴 표정을 지어대서 정말 빵-하니 웃음이 터졌다.
진짜 김태형-나도 중증 인가봐.
정떨어지는 니 모습이 난 젤 웃기고 재밌는데 어떡하면 좋지 나.
방금까지 걱정하고 마음이 괴롭던게 맞나 싶을 만큼 태형과 함께면 두렵고 무서운게 없었다.
태형일 좋아하면서 한가지 좋은점은 더이상 나를 자책하지 않게 됐다는 것? 힘들어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옆에 있는 것 만으로도 마음에 안정이 되어서 그 전만큼 내 자신을 학대하거나 괴롭히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 너 나한테 대단한 존재였네. 형들이 들었음 엄청 비웃었겠다. 나 미쳤다고-
"밥 너무 많이 먹어서 못 뛰면 어떡하지. 똥싸고 갈까?"
"아,제발- 결승 내일 하는거 아니야?"
"짐나. 더운데 커피나 한사바리 땡길까?"
뭐때문에 또 하이텐션이 된건지. 내 말은 듣는둥 마는둥 어깨동무를 하며 끌어당기는 태형의 걸음에 맞춰 쫒아가기 바빴다.
이틀간은 연습을 빼주신다고 했던 성득쌤에게 감사했지만 체력을 요하는 강행군에 또 깔려있는 카메라에 몸도 마음도 지친 우리는 어제와 같은 힘이 샘솟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금막내 덕분에 계주도 우승하고 윤기형도 이기고 결과적으로 성과는 너무 좋았다.
참 긍정적인 형들은 생각할 시간도 많고 느긋하게 있을 수 있다는걸 감사해 했다. 작업을 여기서 까지하는 그 열정에 혀를 내두를 정도니.
다들 무심한척하면서 얼마나 열정적인지.
이럴때보면 정국이랑 나는 죽이 잘맞았다.
연습이 없는것에 불안함을 느끼는건 우리 둘 뿐이었다. 몸을 쓸데만 생기가 도는 정국이는 이틀동안 달릴때를 제하고는 누워있는게 태반이었다.
미성년자의 슈퍼파워는 너무 무섭다.
출연진들이나 팬들 모두 지친 분위기였지만 막바지에 접어든 촬영에 모두 팬들을 위해 인사를 건넨다고 약간은 산만해져 있었다. 우리끼리 둘러 앉아 팬들에게 어떻게 세레모니를 하냐 상의를 하고있는중 이었다.
'여보세요'
'응, 지민아- 촬영중이야? 통화 괜찮아?"
'네, 선배님'
액정에 뜬 그의 이름에 아무렇지않게- 티내지말자.
침착해. 를 속으로 몇 번 외쳤는지 모르겠다.
내일 갑자기 스케줄 추가돼서 못 볼것 같다고 미리 생각해뒀던대로 말하면 그도 별다른 의심없이 이해할 것 같았다.
어차피 스케줄 때문에 한달은 못볼테니까.
그 후는 찬찬히 다시 생각하면되고. 일단은 지금이 중요하니까..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미처 입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핸드폰을 놓칠뻔했다.
'....봤구나..너'
'!......'
귓가에 파고드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오늘따라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뭘 말하냐며 되묻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버린 나는.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너무 당황해서 대꾸도 못하고 핸드폰만 고쳐잡았다.
무리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며 박지민 빨리와- 라며 나를 부르는 태형이의 목소리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민아'
'네....'
'....하...이따 잠깐 보자'
'죄송한데...형..저 아육대 끝나고 바로 연습실가요'
'그럼 끝나면 연락해'
기다리고 있겠다는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틈도없이 끊어진 전화를 붙잡고 멍하니 서있던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지 고개를 들자마자 태형이 눈에 들어왔다.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서부터 티가나서 형들이나 태형인 넌 연기는 절대 하지말라며 놀려대던게 생각났다. 태형아, 나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