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화양연화_40
“괜찮아?”
술기운에 열 오른뺨과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위험해 보였다. 얌전하게 따라오는 태형이를 추켜안으며 부축해봐도 키 차이가 나서 그런지 자꾸만 걸음이 느려졌다. 함께 부축해준다던 매니저는 보내고 혼자서 태형이를 이끌고 숙소로 가는 길은 몇 걸음 안됐지만 힘들었다. 숨을 내쉴 때 마다 베어나오는 짙은 향수 냄새에 속이 울렁거려 태형이 어깨를 더 꽉 끌어안았다. 팬들 때문에 밀어내지 못하고 내 손길에 얌전한 태형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싫은 기색이 역력해 보여 괴로웠다.
대문을 지나 마당을 들어섰을 때 걸음을 멈추는 태형이와 마찬가지로 멈춰 섰다. 태형일 올려다보니 내 어깨에 기대 있던 팔을 떼어내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단단하게 감싸던 품이 멀어지니 허전했다. 눌러쓴 모자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마 만에 함께 있는 건지 옆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태형이가 웃는 모습을 본 게 언제인 줄도 몰랐다. 벨도 없이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에게 비볐던 입술이어도 희미하게나마 올라간 입꼬리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핑계를 대고서라도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했다.
“하 괜찮냐고?”
술기운에 휘청이는 몸을 부축하려 다가섰다.
“아.”
“손대지 마.”
그제야 모자 아래 가려진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비뚤어진 입술 끝과 날 선 시선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칠게 쳐내는 손길에 놀라서 움찔했고 그런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스쳐 지나가는 태형이의 태도에 불안해서 심장이 두근댔다. 나를 미워하는 건 당연했지만 거부하는 태형이의 손길이 아파서 멍하니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태형일 버리고 배신한 건 나였지만 태형인 변하지 않을거라는 근거없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우리의 시작이 나였다는 걸 잠시 망각했던 것 같다.
미운 말만 하고 상처만 준 내가 싫을 만도 했다. 내 욕심으로 마음을 표현했고 사랑을 갈구해놓고 이제 와서 태형이의 애정을 떼라고 치부했고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받은 척 모든 걸 태형이 탓으로만 말하는 내가 질릴 만도 했다.
내가 자초했고 감당해야 하는 거였지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말 우리의 이별이었다.
밖으로 나돌고 보란 듯이 다른 이를 품는 태형이의 모습이 일부러 나를 상처주기 위해서 아님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를 봐달라는 유치한 감정싸움이라 치부해서 그랬던 걸까 모질지도 못한 태형이가 나를 밀어내니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사실대로 말을 했다면 태형이가 상처받지 않았을까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태형이에게 왜 일을 크게 만들었냐며 원망이라도 해봤다면 감정 정리가 쉬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침묵을 택했고 의식하지 않으려 더 밝은 척 웃음을 흘리고 신경 쓰지 않는 척 태형이도 챙기며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그런 나를 비웃듯 태형이의 옆을 차지한 여자애들은 바뀌어갔고 스쳐지나갈 때마다 풍기는 향은 더욱 짙어져만 갔다. 나까지 형들의 걱정을 보탤 수는 없어서 스케줄을 제외하고는 꼬박꼬박 숙소에만 있었다. 홈파티 준비로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서 그런지 형들 모두 약속이 있다며 연습이 끝난 뒤로 각자 갈 길을 갔다. 매니저 형들도 집에 잠깐씩 들렀다 온다며 우르르 빠져나가니 숙소가 휑했다. 의리인지 지개매 형과 단둘만 남았고 왜인지 조금은 웃겨서 얼굴을 마주한 형과 한참을 웃었다.
“형 술 한잔 할까? 아니 나 술친구 해줘.”
“무섭게 왜 이래. 너도 오랜만에 나가지 왜.”
“피곤해요. 밖에서 먹으면 신경 쓰여.”
투어 중에도 종종 방에서 혼자 마시다 보니 습관이 됐는지 술을 안 마시면 잠이 안 왔다. 정신이 나갈 만큼 마시고 싶어도 공연 때문에 주량을 넘겨선 안됐기에 가볍게 마시는 게 습관이 돼버렸다. 항상 마지막 잔을 들이켜고 나면 쓰러져 잠들고는 했다.
어설프게 마시면 더 생각이 나서 주로 숙소 방 안 혼자 마시는 게 제일 편했다. 행여나 실수로 헛소리를 할까 겁이 나기도 했고
“잠깐만 안주될 만한 게 없는데? 뭐 시킬까?”
“난 괜찮은데 형 먹고 싶은 거 시켜.”
“야 깡술 마시게? 너 저녁도 안 먹더만 왜 이래.”
안주 없이 술만 마시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은 게 독한 술에 속이 헤집히고 아릿해야 그나마 눈물이 안 나는데 하긴 형이 실연의 아픔을 알리가 없었다.
“노브레끼냐 왤케 마셔 너.”
“아우 아재야 뭐야 노브레끼가 언제 적 말이야.”
“니네땜에 아재 됐지 뭐. 아니야 석진이 때문이다.”
“우리 진형은 그렇지 늙었지.”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별거 아닌 말에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닭가슴살 소시지를 안주삼아 먹는 정일이 형 잔을 채워주며 안주 대신 물을 마시던 나는 이어지는 정일이 형의 말에 소주를 병째 들이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말 하는 나도 웃긴데 바쁜 거 아는데 왜 너네는 연애들을 안 하냐. 그 뭐냐 태형이는 연애도 잘만하더만 넌 궁상맞게 왜 나랑 이러고 있어.”
오늘 술친구를 잘못 픽했다. 혼자 마셨어야 했는데
“징짜 형이랑 술 안 마셔 나 잘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성질을 내는 나를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는 형에게 틱틱대다 식탁에 올려져 있는 소주병을 들고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꾹꾹 참고 있는데 왜 김태형 얘기를 꺼내냐고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문도 걸어 잠갔다.
‘야 지민아.’
‘지민아.’
“형 나 취했나 봐! 잔다.”
궁상 이런 궁상도 없겠다. 아니 진상이다. 맨날 석진이 형더러 술 마시면 치댄다고 진상이라고 구박했는데 지금 내가 부리는 주사도 진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찔끔 흐른 눈물을 닦고 소주병을 땄다. 오버 조금 해서 진짜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형들이나 사람들이 날더러 독하다고 하는데 정말 나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던 사람들의 괴롭힘도 죽으라고 악담을 퍼붓는 언어폭력도 참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미 길들여져서 다정한 애정으로 나를 길들여버린 태형이 하나 때문에 죽고 싶었다. 쓰디쓴 술을 물처럼 들이켜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더 보고 싶기만 했다.
소화제를 달고서 억지로라도 먹었던 밥알이 이제는 안 넘어갔다. 잠도 못 자서 그런지 내가 봐도 거울 속 내 얼굴이 형편없었다. 누나들이 메이크업하면서 잔소리하는데 괜히 눈치가 보여 거울 속에서 눈을 굴렸지만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태형이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태형이도 마찬가지로 얼굴 살이 내려 안 그래도 남자다운 얼굴이 더 날카로워져 차가워 보였다.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태형이 너 휴가 때 보검님이랑 제주도 갔더라.”
어느새 핸드폰을 하고 있는 태형이에게 은정 누나가 질투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누나보다 3살이나 어린 박보검 형이 보검님이 되는 마법은 누나가 그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태형이 핸드폰을 자꾸만 힐끔거렸는데 그 형에게서 온 연락이었는지 얼굴을 붉히는 누나가 귀여웠다.
“잘생긴 것들끼리 얼마나 훈훈하던지 그 조합 옳더라.”
그런 누나가 태형이도 귀여웠던지 슬며시 웃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기분이 묘했다.
서로를 구속하고 서로에게 집착하던 것들을 한 순간에 놓게 돼서 그런가 태형이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거슬렸다. 이제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도 잘 알지만 그래도 너무 신경 쓰이고 짜증 났다.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지만 형들과 어울리는 것도 모두 삐뚤어지게 보였다. 내 불안과 신경을 갉아먹듯이 마음속 불신이 자꾸만 커져갔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다 너.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둘이 사귀라는 댓글 보고 누나 완전 공감했잖아.”
누나의 한마디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간식을 집어먹던 석진이 형이 자기 정도 돼야 투샷이 은혜롭지 않겠냐며 오버를 하는 바람에 간신히 두 사람에 쏠린 시선이 흩어졌다. 안 좋은 쪽으로 우울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나만 괴롭고 힘든 것 같았다.
국내 활동이 없어서 좀처럼 인터뷰가 없었지만 미국 시상식에 초대받았던 소식을 내보내고 싶어 하는 방송이 잡혀 짧은 인터뷰가 잡혔다. 홈파티 준비로 이래저래 바쁜 와중에 인터뷰를 해야 해서 약간은 어수선하고 정리가 덜 된 건지 인터뷰 내내 뉘앙스가 이상했다.
“여러 후배 아이돌이 롤 모델로 방탄소년단을 꼽는데요 그중에서도 뷔 씨, 꾸준하게 뷔 씨를 이상형으로 꼽는 아이돌 멤버가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 네 요즘 대세이신 그 프듀에 지운씨?”
“네 맞습니다. 워너원에 지운씨가 뷔 씨를 굉장하게 동경하고 닮고 싶은 선배로 손꼽아 인터뷰마다 언급하는 거 알고 계셨나요? 어 그럼 그 지운씨도 박 씨란 걸 아세요?”
“네? 아아 네.”
“지금도 옆에 계시지만 뷔 씨 절친분들이 모두 공교롭게도 박 씨인데요.”
민감하거나 자극적인 내용이나 질문은 사전에 걸러내는데 인터뷰 내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태형이와 다른 그룹 남자 멤버와 엮으며 의도가 빤히 보이는 질문을 해왔다. 카메라에 잡히진 않았지만 당황한듯한 남준이 형이 모니터 뒤로 서있는 매니저형들을 찾는 시선이 느껴졌다. 생방은 아니기에 편집을 하면 문제는 없었지만 기사 제목만으로도 대중의 관심을 끌기엔 흥미로운 내용일 게 분명했다.
“또 얼마 전에는 보검 씨와 제주도 우정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하던데, 지민씨!
뷔씨와 두 분의 동갑 케미도 대단하시잖아요 혹시 서운하지는 않으셨어요?”
점점 방탄 인터뷰와도 상관없는 질문을 하는 인터뷰어 때문에 형들 표정도 점점 안 좋아졌고 태형이와 나 사이의 묻는 예정에도 없던 질문에 나도 당황했다. 형범이 형이 담당 피디에게 뭐 하는 거냐고 항의를 해봐도 이미 인터뷰 중인 상황이라 담당 피디는 촬영을 강행했다. 우리는 이 이상한 인터뷰 상황을 눈치 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서운했죠. 근데 저 뿐만 아니라 형들도 다 서운해했어요 사실 태형이가, 뷔씨가 드라마 촬영 당시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니 저희가 엄청 신경 쓰고 챙겨줘도 뷔씨도 방탄 활동이랑 촬영 두 가지 다 신경 쓰느라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연히 각자의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대답을 하며 슬쩍 태형이 쪽으로 시선을 줘도 무표정하게 카메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티 내고 싶지 않아도 태형인 숨기지 않았다. 형들과 정국이와는 곧잘 지내도 나와 엮이거나 내가 멘트를 하면 입을 다물어버리곤 했다.
“마지막으로 뷔씨 워너원에 지운 씨에게 영상편지 한 번 보내주시죠.”
“아 어, 지운아 안녕. 우린 게임에서 만나도록 하자꾸나. 장난이고 언제 밥 한번 먹자.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회사에서 보고받은 뒤 결국에 인터뷰 영상은 방송하지 않기로 했고 서면으로 기사만 나가기로 했다.
제목들이 자극적이긴 했지만 우려했던 상황과 달리 기사는 별 내용이 없었다. 분명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태형이와 친한 사람들은 많았기에 근데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기사가 쏟아져 나갔다. 제주도 여행기사는 훈훈한 조합에 바람직한 우정이라며 태형이의 인맥에 또 한 번 난리였고 신인가수와 선배 가수의 친목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었다.
“이제 와?”
공원 어귀로 느린 걸음으로 들어서는 태형이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태형이가 자작곡에 관심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작업하는 것도 녹음하는 것도 다 구경 가서 응원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넌지시 남준이 형에게 물어보는 게 다였었다. 그런 내가 불쌍했던지 연습실에 누워있던 나를 형이 스튜디오로 와보라며 가이드를 들려줬을 때 태형이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눈 앞에 펼쳐졌다. 처음으로 단 둘이 방과 후에 떡볶이를 먹으러 갔던 일, 혼자서 로그 찍던 태형이를 위로하려 새벽에 숙소 탈출했던 날들이며 데뷔, 1위, 고백, 첫 키스 그리고 이별까지
가사는 이미 외울 만큼 보고 또 봤었다. 채워지지 않는 가사는 허밍으로 대체를 해서 녹음을 했는지 태형이의 숨소리와 저음으로 끝이 났는데 그것도 좋았다. 아무 기교도 없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쓸쓸해서 당장 꼭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슬펐지만 그냥 보고 싶은 마음이 더커서 무작정 기다렸다. 연습이 끝나면 한참을 미래를 꿈꾸던 곳에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저 보고 싶은 마음에 우리가 항상 함께했던 곳에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올 거라고 변하지 않는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흥얼거리던 태형이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역시 맨 정신으로 버티기는 조금 힘들었다.
“태형아.
우리 얘기 좀 해.”
며칠 전 정일이 형과 술 마신 날 새벽께 에 들어온 호석이 형은 잠겨진 방문에 결국 소파에서 잠이 들었었다. 점심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도 잠겨진 방문을 형이 두드렸을 때도 나는 정신을 못 차렸다. 괴롭지도 않았고 태형이 생각도 안 나서 계속 잠만 자고 싶었다. 다급하게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겨우 부운 눈을 떴을 때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형의 모습에 숙소에서는 더 이상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냥 평소보다 조금 많이 마셨을 뿐인데 정신도 못 차리는 내 모습에 많이 놀랬었는지 나를 붙잡고 애원하는 형 때문에 자제하는 중이긴 했는데 여기까지 올 용기가 없어서 몰래 조금 아주 조금 마시긴 했다.
“있잖아, 나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거면 그러지 마.”
“뭐를, 뭘 니때문에 그러지 말라고?”
“그 지운, 아니다, 형들이 걱정 많이 해 그러니까.”
혹시나 누군가 들을까 벤치에서 일어나 다가섰다.
술에 취한 핑계로 에둘러 얘기하려고 했다. 내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그저 용기가 없어서 두려운 나를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우리 헤어지는 게 아니라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다.
“그래서 소문 안 나는 애들 만나고 있으니까 신경 꺼.”
“그런 말이 아니잖아.”
“하, 진짜 지겹다. 매번 닌 이런 식이지 형들이 걱정해, 형들 눈치 보여 그럴 거면 고백은 왜 했어 그냥 니 말대로 예전처럼 그냥 지냈으면 됐잖아 왜, 대체 나더러 뭐 어쩌라고.”
“어떻게!”
“니가 뭔 상관인데 왜 방탄에 피해 줄까 봐? 걱정 마. 내가 이번에 깨달은 게 있거든, 그래서 병신같이 두 번 다시 그런 실수 안하려고 숨기기 급급하고 세상 두려운 겁쟁이따위 안 만나.”
“그게 그렇게 중요해? 니는, 니도 조금이라도 내 생각했으면! 그렇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부모님한테 얘기할 수 있냐고 무섭다고 했잖아 왜 모든 사람한테 까발려져야 하는데 그냥, 이...”
“그러면 왜 그렇게 숨겨야 되는데 우리가 죄 졌나.”
“하아.... 누군가 언제 이런 말 한적 있었어 잃을게 많은 사람이랑 잃을 게 없는 사람 중 누가 이길 거 같냐고 그때는 내가 잃을게 많아서 졌어. 지금, 지금도 마찬가지야 우리. 우린 아직도 잃을게 더 많아 그래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억울해? 아, 그래서 그때 잃을 거 없는 다 가진 최현 만났냐.”
울지 않으려 시큰거리기 시작한 두 눈에 힘을 줘도 속수무책으로 고이는 눈물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나 더 서로가 상처받아야 끝이 나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지만 모두가 외면하고 미워해도 태형이만 있다면 그 힘든 길도 꾹 참을 수가 있었다. 그래 그랬었다.
그랬는데 내 앞에 있는 건 태형이가 맞는데 나와 같은 꿈을 꾸고 나란히 걷던 태형이는 없었다. 나약하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기댈 수 있는 품이 사라지고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미래에 절망을 느꼈다.
처음엔 설마 했다. 그저 스쳐 지나는 거라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누군가와 나란히 서있는 태형이를 보며 느꼈던 불안이 점점 현실로 다가왔고 되돌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를 비웃듯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얘기를 노래로 만들고 싶다던 너와 정말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써내려 갔던 이 곳에서 내가 아니어도 된다는 그 말 한마디가 모든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뭐 어쩌자고, 그때 분명히 얘기했제 나 놓지 말라고 힘들어도 버티자고 니가 먼저 나 버렸잖아 니가 먼저, 니가, 내 손 놨잖아.”
삐뚤어진 입술에서 가시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숙소로 돌아왔는지 모를 만큼 머릿속이 온통 태형이가 내뱉은 말로 가득했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울음을 토해낼 수도 없는 내가 너무 불쌍해서 슬펐다. 도망치고 숨고 싶어도 내 몸하나 숨을 수 있는 공간 하나가 겨우 내 방 내 침대뿐이란 게 너무 웃겼다. 태형이가 없는 곳으로 벗어나고 싶은데 내 인생에 태형이가 없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따라 적막한 숙소 조차 우울했다.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가 나약해서 어리석어서도 아니었고 태형이가 준 사랑이 너무 커서 나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