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화양연화_38
“아 하지 마라 쫌.”
등 뒤로 손을 잡아오는 손길을 쳐내며 짜증을 내니까 입을 삐죽거리며 치대 오는 태형일 밀어내며 자리를 벗어났다. 찡찡거리며 뒤따라오는 걸 피해 석진이 형 옆자리에 앉았다. 매정하다고 궁시렁거리는걸 못 들은 척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묘하게 달라진 내 태도에 형들이 한 번씩 힐끔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으레 쟤네가 또였지 그렇게 깊게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 못했다. 태형이도 마찬가지였다. 형들이나 스텝들 있는 곳에서 스킨십을 해오면 쳐내는 내 손길이 익숙해 그저 웃으며 장난스레 삐진 척을 하곤 했었다.
“뭐야 둘이 싸웠어요? 지민이 형 분위기가 영 거시기한데요.”
“뭐래 우리 왕왕왕완전 좋거든.”
“아닌데 지민이 형 기분 별론거 같은데.”
언제부턴가 형들 멤버들 기분도 파악할 줄 아는 정국이가 기특하기도 새삼스레 대견스럽기도 했는데 가끔씩 귀신같이 내 기분이 다운되거나 우울한 걸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는 했다. 태형이조차 잘 모르는 내 기분을 아니 나 조차도 다스리지 못하는 그 감정을 정국이가 알아줄 때면 형이돼서 동생에게 못볼꼴을 보인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태형이와 내가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항상 걱정이었다.
“야 내가 얼마나 이뻐 아니 모시고 있는 줄 니가..”
“잘 좀 합시다. 뷔형.”
“야 아니라고! 저게 진짜.”
이겨먹지도 못하면서 괜히 큰소리로 정국이 뒤로 허공에 주먹을 쥐며 장난치는 태형일 보며 웃기다며 깔깔거리는 누나들을 보면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정국이의 말속에 뼈가 있어서 장난스레 툭 내뱉었지만 정국이의 걱정 어린 진심에 괜스레 미안했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아아아 또 나가? 어디가아.”
금세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선 매달려오는 태형인 도착 해서 인증샷 찍어서 보내오라며 계속해서 나를 귀찮게 했고 자꾸만 밀어내고 피하기 바쁜 내가 밉지도 않은지 어느새 귀갓길까지 신경 쓰고 있는 태형이 앞에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숙소 연습실. 연습만 가득한 스케줄에 돌아버릴 것 같아 끝나면 무조건 나갔다. 누군가 만나지 않아도 나갔고 또 혼자 있는 게 싫을 때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가서 미친 척 술을 마셨다. 참고 참으면 분명 이 시간이 지나갈 테니 이 악물고 버텨야 했다. 하루아침에 끊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기에 천천히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윤기 형이 했던 말이 그냥 장난인 줄 아는 태형인 형에게 가서 그날 자기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다며 형에게 나쁜 말해서 미안하다며 먼저 형에게 가서 잘못을 구했다고 했다. 물론 내가 형에게 대들면 되냐고 돌아가면 형에게 사과하라고 배겟머리에서 속삭였기에 윤기 형과 태형이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지 형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라서 가끔씩 버릇없는 태형일 못마땅해했다. 형들이 나는 미워해도 태형인 이해 해줬음 했다. 워낙에 마음이 여리고 외로움을 많이 타서 사람 사귀고 치대는 걸 좋아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서 상처도 많이 받아 힘들어하는 걸 지켜본 나로서는 힘들지 않게 지켜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
“지만이 요새 고민 있냐 술도 자주 마시는 거 같고.”
“그냥 좀 답답해서요.”
“멤버들 문제야? 아님 회사?”
“아니에요.”
이 바닥에서 이미 잔뼈가 굵은 사람들 눈을 속일 수는 없는지 단번에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걸 아는 형들이 고마웠지만 딱 이 정도였다. 가족도 아니고 멤버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나를 걱정해주는 좋은 형들이지만 믿을 수는 없는, 나에게 관계의 정의는 그랬다. 마음 터놓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친구는 태형이뿐이었다. 남들이 진심으로 내 걱정을 같이 고민해주고 조언해주는 건 고맙지만 내 치부까지 들춰서 밑바닥까지 꺼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괜히 나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서 부러 밝은 척을 하며 술잔을 들고 귀여움을 떨어도 형들의 걱정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지민아 하아... 어느새 내가 이런 얘기 하고 있다는 것도 웃긴데 뭐 꼰대 같을 수도 있겠다. 근데 내가 여기서 이 바닥에서 너 같은 애들 몇 명이나 만났을 거 같아 지금, 나도 팀 활동하고 있고 종인이도 하고 우리 다 하고 있지만 어쨌든 여기선 내가 젤 오래 지내보니까 있잖아. 뭐 우리한테 털어놓지 못하는 얘기라면 가벼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회사 문제든 멤버들이든 네가 말을 안 하면 곪고 곪아서 썩을 거야 분명 아님 네가 미치던가.”
출국하는 시간에 맞춰 나온 인파에 밀려 한걸음 뗄 때마다 달라붙는 팬들에게 밀려 간신히 입국장을 통과했을때 어느새 손에 쥐어진 편지 꾸러미에 정신이 없었다. 손가락 사이에 감겨드는 걸 피할 새도 없이 손에 쥐었을 때 이미 받아 든 뒤라 매니저형이 저지할 새도 없었다. 손을 뻗어 편지를 건네 달라는 형에게 그냥 갖고 있겠다고 한 것부터 잘못이었을까 궂은 날씨에 연착까지 돼버린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 기다려야 해서 라운지에 들어가자마자 정국인 홀린 듯이 음식을 가지러 갔고 입맛이 없던 나는 소파를 찾아 앉았다. 비행기에서 자려고 잠을 설쳤더니 벌써 피곤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몸을 깊게 묻으니 무릎 위에 올려둔 편지가 눈에 걸렸다.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나에게 전해 줄거라고 내미는 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성 들여 썼을게 뻔한 팬들의 편지는 나도 모르는 나를 알 수 있었고 얼마나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 당신들을 위해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것만이라도 나는 항상 고마웠다. 그랬는데 당신들도 내 삶의 원동력인데 왜
하얀 종이가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민이형!”
“어?”
“피 나잖아!”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애초에 자존감이 낮은 애라서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못한다고 잘못됐다고 하는 건 죽어라 노력해서 잘할 자신이 있었다. 잠안 자고 온 몸이 욱신거리도록 안무 연습할 수 있고 목에서 쇳소리가 나도록 연습해서 우리 팀이 잘되고 멤버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점점 인기와 함께 늘어나는 팬들은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건 사랑해주지 않았고 그들의 환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비난과 함께 언제고 돌아설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처음엔 그걸 참을 수 없어서 많이 울기도 했다. 나는 상처받아 속이 문 드러 질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은 척 당신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피눈물을 흘렸었다. 그 모든 걸 견디고 견디며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서러웠는지 알까 우리가 흘린 눈물이 그 대가라는 걸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건 이미 연습생 때부터 길들여져서 참아야 했다. 나를 미워해도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해도 그리고 나를 죽이려 해도 무조건 참아야 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형들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 더 토할 것 같았다.
“괜찮아요. 괜찮아.”
형들의 걱정 어린 시선에 담담한 척 씩씩하게 웃었지만 형들도 태형이도 다 알고 있었다.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편지를 낚아채려는 태형일 밀어내고 형범이 형에게 편지를 맡겼다. 형들이랑 정국이는 안 봤음 했다. 그중에 태형이가 제일 안 봤으면 해서 갈무리를 해서 바로 매니저형에게 건넸다.
“괜히 저 때문에 또 일 커지는 거 싫어요. 그냥 좀 더 주의할게요 신경 쓰지 마요.”
“야 니는 말을 해도.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김태형 흥분하지 마. 지금은 형들이, 회사에 맡기는 게 제일 현명할 것 같다. 좀 더 주변 조심하고 힘들겠지만 우리가 신경 써서 잘 하고 오면 되는 거야 그리고 지민이는 니가 생각하는 거보다 강해 그러니까 괜히 저런 것들에 흔들리지 마.”
괜찮은 척 담담한 척 적당히 화나고 짜증 나는 척 연기는 못해도 분위기는 맞출 줄 알았다. 다들 한두 번씩은 겪은 일이기에 내 기분이 어떨지 누구보다 더 잘 알터였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아서 지혈만 간단히 하고 수속을 했다. 해투 첫 스타트부터 액땜했다 치자며 부러 다들 밝은 척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불안했다.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내 뒤에서 맴도는 태형이가 느껴졌지만 태형이에게 기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까 봐 돌아볼 수가 없었다. 칠레에 도착해서 방배정을 받으며 따라붙는 시선도 다 모른척했다. 투어가 시작되면 한 공간에 있을 시간이 줄어서 다행이었다. 태형이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지민이 형, 진형 방에서 밥 먹을 거죠?”
“아니 나 속이 좀, 이따가 먹을게.”
혼자 두기 불안했던지 자꾸만 엉겨오는 멤버들이 다 귀찮았다. 주로 모여서 먹던 저녁을 오늘은 각자 방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나 때문에 또 분위기가 망친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웃으며 인사해주고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가방이며 옷가지를 대충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 위로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한국에서부터 꾹꾹 누르고 참았던 모든 걸 쏟아냈다. 너무 짜증 나고 창피해서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인 거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형들은 그들이 못나서 질투를 하는 거라고 신경 쓰지 말라 했지만 자격지심 덩어리인 나는 그 말 조차도 신경이 쓰였다. 신경 쓰는 것도 내가 너무 못나서 속이 좁아서 혼자 상처받고 아파하는 거라고
소위 말하는 개인 팬. 멤버들 각자를 더 좋아하는 팬들 때문에 항상 문제였다. 공연 중에도 비키라고 안 보인다고 하는 야유도 물론이고 좋아하는 멤버들이랑 붙어있지 않으면 왜 같이 안 있냐며 괜히 멤버들 간에 서먹하게 만드는 간섭까지 그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내가 지금 태형이 때문에도 많이 예민해서 그런 거라 생각해봐도 팬레터를 가장한 칼심이 덕지덕지 붙은 편지엔 악담과 욕이 잔뜩 이었고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밉고 싫으면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생각해봐도 너무 무섭고 슬퍼서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경찰에 신고해서 단순히 범인을 잡는다고 해서 끝날 일이라면 회사에서도 그렇게 대처를 할 테지만 가십거리로 전락할 뉴스와 언론에 뿌려질 기사들은 전국에 까발려질 테고 또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이 동정과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대한다면 그 고통을 또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지민아
문 밖에서 들리는 태형이의 목소리에 더 눈물이 나왔다. 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초라하고 못나서 대답도 못했다.
짐나
지민아
지금 이 문을 열면 그냥 무너질 것 같았다. 바보같이 엉엉 울면서 태형이에게 매달리며 살려달라 빌게 뻔했다. 또 그 넓은 품에 얼굴을 묻고 숨겨달라 안아달라 하며 태형일 붙잡고 매달릴게 분명했다. 네가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안아주면 난 또 그냥 괜찮다고 하겠지
문고리를 붙잡은 채 한참을 망설였다.
아무런 대꾸도 없는 방문을 두드리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태형이 목소리를 들으려 문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주저앉았다. 고작 문 하나가 이렇게 높았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그 온기는 이렇듯 높고 두꺼워 바보 같은 나는 이 문을 깨뜨릴 힘이 없다는 걸 또다시 깨달았다.
한참을 문 앞에 서성이던 태형이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다시 혼자가 된 방 안에 갇혔다.
“가지 마 태형아.”
가지 마 나 좀 안아줘
열지 못하는 문 앞에서 가만히 앉아서 울었다.
문에 도시락 걸어뒀어 엉뚱한 생각하지말고 밥먹고 푹 자. 나중에 확인한다 오후8:50
다정한 김태형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씻고 약도 바르고 울지 말고 오후8:50
응어리가 사라지길 바라며 울고 또 울었지만 태형이의 애정이 미안하고 고마운 이기적인 나는 또 숨을 쉴수가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손가락에 걸리는 상처가 쓰려왔다.
*
태형이가 챙겨준 도시락을 먹고 따뜻한 물에 샤워도 하고 안정제를 삼키고 아침까지 내리 자고 일어나니 어제보다 나은 컨디션에 문을 열고 나왔다. 걱정된 형들과 매니저 형들은 말은 안 했지만 어제보다 나아 보이는 내 표정에 안심한 눈빛이었다. 괜찮은 척하는 건 자신 있어서 웃으면서 장난도 치고 시답잖은 농담도 하며 공연 준비를 했다. 흘린 땀만큼 준비도 많이 했기에 멤버들 모두 기대반 설렘반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도 덥고 공연장은 커서 체력 소모도 크지만 팬들의 호응에 기운 내서 공연하다 보면 항상 평소보다 텐션이 올라가서 첫 공을 끝내고 나면 모두 지쳐 무대 뒤에서 쓰러졌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그런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어어 정국이! 정국이.”
“으으, 형, 하아...괜찮, 나 괜...”
첫 공연부터 무리를 한 정국이가 결국엔 쓰러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씩씩한 정국이가 무너지는 모습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내 불운한 기운이 정국이에게 영향을 끼쳐서 아프게 만든 것만 같아 마음이 불안했다. 자꾸만 목구멍이 조여왔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정국이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공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형, 지민이 형. 나 괜찮아요.”
눈물조차 사치인 것 같아서 뻑뻑해진 눈으로 정국이를 바라보니 힘도 없으면서 형들 걱정한다고 웃는 모양새에 울컥했다. 이때까지 한 번도 하기 싫다고 힘들다고 투정 한번 없던 애가 아파서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이 너무 큰 충격이었다. 스텝들이 다 붙어서 정국일 케어할 때 무대를 걱정할 수밖에 없던 남준이 형도 공연을 끝내자마자 눈물을 보였고 멤버들 모두 정국이 걱정에 분위기가 한껏 가라앉았다. 투어 시작 전부터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멤버들에게 해를 끼친 것만 같아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잠깐이라도 스치듯 원망했던 그 마음 때문에 팬들에게 받은 그 상처를 괜히 멤버들 탓이라 여긴 내 나쁜 마음 때문에 벌을 주신 것 같아서 괴로웠다. 괜찮다고 하는 의료진의 말도 믿을 수가 없어 정국이 곁에 있겠다는 나를 모두가 프로답지 못하게 왜 그러냐며 한소리 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나를 달고서 종종 아파야겠다는 정국이 머리를 쥐어박고서야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아파도 슬퍼도 힘들어도 웃어야 하는 우리 일을 원망할 수는 없지만 항상 멤버들이 아프지 않고 행복만 했으면 하는 바람은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아따 정국이 없으니까 허전하네.”
“그러게 다 같이 모이기 왜 이렇게 힘드냐.”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여섯 명이었다. 괜찮다고 같이 밥 먹을거리던 정국이를 따끔하게 혼낸 윤기 형은 컨디션 조절 못해서 모두 걱정하게 했으니 쉬면서 반성하라며 정국이는 저녁식사에 못 끼게 했다. 시끄럽고 즐겁게 실컷 떠들다가도 빈자리가 느껴질 때면 조용해졌다. 서로의 유대가 너무 깊어도 문제였다. 방송 중이니 웃고는 있지만 머릿속은 멍했다. 의식도 못하고 들이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다 마주친 시선의 태형이의 눈빛은 화가 난 건지 조금은 가라앉아 보여서 먼저 피하고 말았다.
당분간은 몸조심하고 멘탈관리 하자며 서로를 다독이고 응원해주며 투어를 이어나갔다. 어느 날은 코디 누나들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불안해하던 나만 제외하고 매니저형들과 누나들은 볼을 실룩거리며 표정관리를 못했다. 형들이나 태형이도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각자 할 일을 하느라 금세 관심을 거두는 우리들에게 결국 의상을 준비하던 누나들이 답답함을 털어내듯 너네 빌보드 간다고 빌보드를 포효하는 바람에 얼떨떨한 우리는 재깍 반응도 못했다. 실감이 안 나서 장난치는 줄 알고
“진짜요?”
“진짜? 에이 거짓말 누나 거짓말이죠?”
“진짜라고! 너네 빌보드가서 입을 옷 우리 준비하는 거야.”
몇 날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게 의상이었다니, 그것도 미국 무대를 위한 다들 실감이 안 나서 좋아하지도 못했다. 아니 좋은데 어이가 없었다. 호석이형이 꿈 아니냐며 자기 볼 좀 꼬집어보라던 말에 남준이 형에게 얼굴을 쥐어터트리듯 꼬집히고 나서야 눈물을 매달고 우리를 얼싸안고 좋아했다.
아이들처럼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울기도 하며 마냥 좋아서 행복했다. 그동안의 고생과 인내를 함께해준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줬다. 정신없는 와중에 태형이와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일방적으로 자꾸만 변한 내 태도에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지금처럼 또 아무렇지 않게 웃어주면 태형인 다정한 눈동자로 애정 가득하게 나를 바라보며 마주 웃어줬다. 막연하게 꿈만 꾸던 모든 것들을 함께하고 있다는 현실도 실감이 안 나지만 날개를 달고 나니 상상하지 못한 것들이 눈 앞에 펼쳐져서 두렵기도 했다.
“괜찮다 내 그냥 혼자 있고 싶어.”
“그 또라이새끼는 신경 쓰지 말고 이제 우린 밥이나 먹읍시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죽이고 싶을 만큼 무엇을 잘못한건가 하는 생각을 해봐도 모두들 너무 사랑해서 광기 어린 삐뚤어진 애정표현이라고 좋게 포장해서 나를 위로해줄 뿐이었다. 그런 것에 속을 만큼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지만 또 모두를 위해서 모른척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수습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내 마음은 수습을 할 수가 없어서 너무 괴로웠다.
“태형아 나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혼자 있으면 또 스트 받으니까 어 내랑...”
“나 좀 그냥 내버려두라고!”
걱정이 돼서 내가 신경이 쓰여서 그런다는 걸 알지만 모든 게 다 귀찮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 오는 팔을 슬쩍 밀어내도 자꾸만 엉겨오는 태형이의 다정한 목소리에 속에 있던 말이 쏟아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는 모습도 싫고 뭐든 쉽고 아무렇지 않은 태형이의 태도에 참을 수가 없었다. 왜 나만 힘들고 괴로워야 하는지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해서 결국에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내뱉고 말았다.
“니는 네 일 아니니까 쉽겠지 하, 눈엣가시 같은 내가 없어져야 저들이 멈출까 네가 뭘 알겠어 나 진짜 미칠 것 같애 돌아버릴 것 같다고 이게 신경 안 쓰면 없어지는 일이야? 넌, 너는 항상 그래 어떻게 모든 일이 그냥 대충대충 일단 일 다 저지르고 그다음은 어떻게든 되겠지잖아 우리 지금 열아홉 아니야 우리 때문에! 우리 곁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눈에 안 보여? 모두가 아니라잖아! 다 다, 잘못된 거라고 하잖아 나는 난 감당 못하겠어 나는 이제 못하겠어.”
내 분에 못 이겨 높아진 음성과 폭력과도 같은 말을 내뱉는 나를 바라보는 태형이의 눈동자가 당황함에 떨리는 것도 무시한 채 가슴속에서부터 걸린 듯 말을 할 때마다 턱턱 걸려 목구멍을 타고 뱉어낼 때마다 속이 문드러지는 것을 참아가며 부정의 말을 쏟아냈다. 이미 상처받아 너덜너덜한 내가 먼저 끊어내는 게 나았다. 나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충분히 헤어질 수 있을 거라 아니 태형이를 향한 내 사랑을 끊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애정이 없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할게 분명했다.
“그만하자. 우리 여기까지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