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화양연화_27
[뷔민]화양연화_27
꿈같은 하루를 보내고 현실로 돌아온 우리는 그 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컴백과 함께 타이틀곡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곡도 좋았지만 소년 같았던 우리들이 한층 성숙하게 돌아온 게 팬들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어필이 됐고 매일매일 다른 반응에 형들도 태형이도 매니저형들도 힘든 줄 몰랐다.
"아 지민이 형 안 힘드러여? 뭔 놈의 스쿼트를 그렇게 해여?"
"후우 45...46..말 하아 시키지 마!"
"진짜 이상한데서 고집이야 저 형은"
엉덩이에 집착하는 태형이 등쌀에 못 이겨서 매일매일 스쿼트를 하느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헬스는 못하게 하면서 스쿼트는 계속하라며 옆에서 귀찮게 해서 내가 이걸 또 왜 시키는 대로 하고 있나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스쿼트만 하면 내가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던 엄청난 딜에 오케이를 했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과 핸드폰 게임 사이에서 힐끔거리기 바쁜 태형인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대충하는 척만 하기엔 지켜보는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며칠 뒤 음악방송에서 만난 성재와 영민인 다행히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쿨한 척하던 태형이도 내심 걱정이었던지 애들한테 더 치대면서 우린 영원한 브로라며 호들갑을 떨며 한참이나 성재의 대기실에서 민폐를 끼쳤다. 불안하고 걱정되면서 왜 그렇게 인정받고 이해받길 원하는지 사실 태형이가 이해가 안 갔다. 서로의 생각차이겠지만 우리 서로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난 지금도 너무 좋은데 꼭 우리의 관계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집착적인 모습을 보면서 또 내가 남자인 게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한계에 대한 태형이의 방어기제 인지도 몰랐다. 좋아하고 아끼는 것들에 대한 애착과 애정은 물건이나 사람을 떠나서 무조건 자기와 소속이 되어야 안정을 찾기도 했다. 정이 많은 게 때때로는 태형일 좀 먹게도 하는 것 같았다.
"짐나 103개 했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버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스멀스멀 올라오는 땀방울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잔인하게 개수를 짚으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일어서는 태형일 바라보는 내 눈빛은 당장이라도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었다. 스케줄에 치여서 쪽잠을 자는 게 이주가 다되어가는데 딜이 뭔지 내가 누구 때문에 왜 이 생고생을 하는데 아주 얄미워서 이가 갈렸다.
"니도 그럼 오늘 게임 할당량 다한 거다"
"아 왜?! 아직 너 다 안 했잖아"
"......내 개수 채우면 니 오늘 게임....다 한 거다"
이를 악다물며 태형이를 쳐다보니 눈길을 슬쩍 피하면서 딴소리를 하는걸 확실히 하라고 못을 박으니 슬금슬금 옆으로 와선 힘들지 하면서 다리를 주물러 준다며 종아리를 주물럭거리는데 모든 게 다 귀찮았다.
머리만 닿으면 기절하면서 숙소에 들어가면 게임하기 바쁜 태형이 때문에 몇 번을 싸웠는지 모른다. 드라마 하나가 애를 아주 배려놨다. 바르고 착실하게 커온 범생이를 나쁜거 아니고 좋은 거라며 꼬셔서 물들인 화랑형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술 담배를 안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체력관리를 해도 컴백한 달은 힘들기 마련인데 매일이 게임이니 사실 속상했다. 잔소리 같을까 봐 되도록이면 간섭을 안 해야지 하면서도 옆에서 지켜보면 피곤해하며 체력이 점점 떨어지는 게 눈에 빤히 보여서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대꾸하게 되는 날도 더러 있었다. 옛날 같았으면 뭔 상관이냐며 받아치면 말다툼 같은 실랑이에 서로 빈정이 상해서 며칠을 말을 안 했을 테지만 지금의 태형인 순간 욱하는 것도 참아가며 나와 맞춰주려 했고 서로가 의식하며 조심하는 우리의 깊이는 확실히 옛날과 같지 않았다.
"나 코코팜 먹고 싶어"
"아 그거 3스튜디오 끝에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가기 싫어?"
"어? 아아니 짐나 우리 같이 가까?"
내 팔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다가 메이크업 원장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얼굴이 잔뜩 찌푸려지더니 입술을 툭 내밀고는 대기실 문을 열고 나갔다. 스킨십에 목이 마른 우린 틈만 나면 몸을 맞대고 있어야 마음에 안정을 느껴서 손가락 하나라도 겹치고 있기 일쑤였고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서 방송이나 팬 행사에서도 자제를 못하고 붙어있기 바빴다. 팬들 사이에선 신경전 끝난 구오즈라며 남자들 세계의 약간의 질투와 시기도 넘어선 우정이라며 우리 둘의 케미가 다른 멤버들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며 좋아해 주시는 반응에 기분이 좋기도 했다.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한참을 수다를 떨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태형이를 찾아 나섰다. 또 옆길로 샛나해서 따라왔더니 그새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는 태형이보였다.
분위기가..... 코너를 돌면 그대로 마주하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벽에 바짝 기대고 말았다. 그냥 인사를 나누는 것일 수도 있는데 괜히 기분이 나빴다. 요즘 제일 핫한 걸그룹 멤버였다. 대기실만 벗어나면 달라붙는 시선과 관심 때문에 되도록이면 방송이 끝날 때까지 대기실을 벗어나지 않았었는데 괜히 내가 음료수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이런 상황과 빌미를 제공한 것같아서 짜증이 났다.
"오빠, 우리 멤버 중에 하연이 알죠?"
"응 알지"
"혹시 어때요?"
"뭐가?"
엿듣는 건 안 좋은 건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태형이 대답이 신경 쓰이면서 빨리 자리를 피해야 된다는 생각과 함께 설마 태형이 거절하겠지 하는 묘한 기대감이 뒤섞인 감정이 속에서 들끓었다.
"오빠 여자 친구 생겼어요?"
"어? 아니"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바싹 자른 손톱인데도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에 너무 아팠다. 내 보일수없고 드러내지 못해도 그래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같아선 당장에 중간에 껴들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치고 싶지만 내 위치 우리의 관계에 처한 현실의 벽 앞에서 나는 그대로 멍청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요? 그럼 혹시 하연이한테 오빠 번호 줘도 돼요?"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등을 돌리려 했다. 아니 사실 태형이가 그렇게 하라고 할까 봐 겁이 나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서운하지만 현실이니까. 혹시나 태형이가 연락하고 싶다고 하면 허락해줄 마음도 있었다. 내 자격이 허락이라고 말할수있는 위치가 될까 싶지만 다른 사람과 나눠서라도 태형이 마음 한 자락이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감내할 수 있었다. 또다시 느꼈지만 내 마음의 무게는 생각보다 심각하게 태형이에게 의지하고 있고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 둘 사이에서 나는 철저하게 '을' 일수밖에 없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근데 걔 쌩얼 예뻐?"
"네?"
"내 이상형 쌩얼 이뻐야 하는데 약간 홍조 있고"
하 진짜 김태형.
"입술도 약간 도톰하다 못해 좀 두꺼워야 하고 어...음 엉덩이도 그 뭐더라 애플힙? 아무튼 완전 힙업 이어야 하고 또 뭐 있지 춤도 잘 춰야 하고 현대무용도 잘해야 되는데 걔 잘해? 키도 한 175정도 돼야 하는데"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낯이 뜨거워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말았다. 잠깐이라도 나쁜 생각을 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랩 하듯이 속사포로 내뱉는 태형이의 진지한 대답에 가슴이 뭉클거리며 울렁였다. 정말 속에 있던 뜨거운 덩어리들이 춤추는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서 행복해서.
태형인 솔직하다 못해 순수 하단 걸 또 바보같이 잊었었다. 거짓말쟁이에 소심한 나와달리 정말 모든 걸 다 내보여준 태형이의 믿음을 내가 배신할 뻔했다.
진짜 간사하게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지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붕 뜬 기분 그대로 대기실로 들어서니 뭐하다 와서 얼굴이 그러냐는 호석이형의 질문에도 웃음만 나와서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진짜 박지민 자존심도 없다. 혼자 땅끝까지 삽질할 때는 언제고 태형이 한마디에 기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정말 벨도 없었다.
"박지민! 코코팜 왔다"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형이 뒤로 후광이 보였다. 더 좋아질 수 있을까싶을 정도로 태형이가 너무 좋았다.
"아 왜 이렇게 늦게 와"
"내가 어 이 코코팜 구하려고 얼마나 역경과 고난을 어 인마 따흐 너 이거 한 방울씩 아껴마셔라"
"고마워 잘 마실게"
옆자리에 푹 주저앉으며 치대 오는 태형이의 차분한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면서 수고했다고 웃어주니까 팔목을 덥석 붙잡아오는 손바닥은 분명 차가웠는데 그 안의 태형이 속마음을 들여다봐서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손길이 뜨거웠다. 사방의 눈들을 피해서 손을 맞잡고 얽히는 손가락들이 내 불안한 마음에 충만함을 느끼게 해줬다.
"태형아- 자?"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침대에 누워있던 태형인 내 목소리에 반쯤 상체를 일으켜서는 무슨 일이냐면서 소근 거렸고 벌써 잠든 건지 남준이 형의 요란한 코 고는 소리를 뒤로하고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밤손님 마냥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태형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잠 안 오나?"
"응"
이불을 젖히고 내가 자리 잡을 수 있게 안쪽으로 몸을 틀어주는 태형이 품 속으로 안겨들었다. 남준이 형이 뒤척일 때마다 우리도 숨을 참으며 움직임을 멈추었고 어두운 방안임에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콧등이 잔뜩 실룩거렸다.
"너무 피곤해서 잠이 안 오는 갑다"
"자장자장 해줘"
손등을 일정하게 토닥이는 태형이의 손가락에 고개를 돌려 태형일 올려다보니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 오는 태형이 턱 언저리에 스치듯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이렇듯 태형인 나름대로 매일 내가 외로워하지 않게 맞춰주며 재밌게 해줘서 하루하루가 나와 같은 줄 알았다. 태형이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생각도 못했고 팬미팅 현장에서 할머님 얘기를 꺼냈을 때 얼마나 태형이가 꾹꾹 참고 또 참고 있었는지 그 깊이가 가늠이 되면서 마음이 아팠다. 내가 힘든 것 내가 서운한 것만 생각하기 바빴지 태형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뭐가 힘든지는 알려고도 안 했다는 게 너무 미안해서 현장에선 말없이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가끔씩 힘들어 보이면 괜찮다고 하는 말이 그냥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빈말이었단 걸 태형이의 배려였다는 걸 하루하루 태형일 겪으면서 알게 돼서 이 애의 배려가 태형이의 마음의 깊이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걸 문득 느낀 어느 날이었다.
"태형아 음 나한테만 이라도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해도 괜찮아. 그냥 나한테는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네 마음.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기분이 어떤지 난 다 알고 싶어 나 질투 많은 거 알지? 내 마음은 다 보여달라고 했으면서 넌 왜 다 안 보여줘?"
두런두런 속삭이는 우리의 목소린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크기였고 나란히 누워서 나눌 수 있는 걱정들과 미래는 오늘에 다 담을 수 없는 크기였지만 나와 너 둘이여서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짐나- 아까 할머니 땜에 운 거는 진짜 괜찮아. 왜 있잖아 문득 너무 보고 싶고 생각하면 슬플 때 그냥....그냥 그럴 때가 있는 거 같애. 그럴 땐 그냥 나 정신 차리게 세게 꽉 안아줘. 사실 너한테 누구보다 든든하고 싶거든 니가 기댈수 있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힘들면 잠시 쉬어가는 그늘이 필요한 것처럼 부러지지 않고 크고 튼튼한 나무 같은 사람이 돼서 지켜주고 싶어. 그래야만 나중에 너를. 우리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정말로 괜찮다는 듯 어둠 속에서 웃어주는 태형이의 미소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남준이 형 코 고는 소리보다 내 심장소리가 더 큰 것 같다며 태형이가 웃으면서 놀려도 정말로 그런 것 같아서 몸을 슬쩍 뒤로 물려봐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는 마음에 태형이 품 안으로 파고들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고향이 그리워서 좁은 공간에서 부둥켜안고 울던 우리가 어느새 함께 할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게..너를 위로하러 와서 오히려 내가 더 위로받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내가 더 눈물이 났다.
"그래도 기댈 수 있는 어깨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울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고 나도 널 위한 나무가 될래"
남자 둘이 눕기엔 조금 좁은듯한 침대였지만 몸을 돌려 태형이 등을 꽉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