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화양연화_14
[뷔민]화양연화_14
이제 더 이상 태형이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매일 보는 얼굴 안 볼 수도 없고 눈 만 뜨면 마주하는 현실에 매일이 괴로웠다. 벌써 오늘까지 이야기 안 한 지 2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방송에선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카메라 불 만 들어오면 태형이가 무서웠다. 일부러 더 치대고 말 걸며 장난치는데 웃으면서 받아쳤지만 속은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나에 대해 전혀 배려 없는 김태형이 잔인해서 미웠다. 다 함께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둘 만 있을때는 노골적으로 자리를 피해 다녔다.
"얘들아, 잠시 모여봐"
마지막 음악방송을 앞두고 각자 할 일을 하느라고 정신없는 대기실에 들어서는 정일이 형과 팀장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팀장님은 사무실 일이 바빠지면서 현장엔 잘 안 나오셨는데 스텝들을 다 내보내고 우리들만 자리로 모으는데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심각한 건 아니고, 스캔들 터졌다"
"헐"
심각한건데...심각한 일인데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팀장님 말에 다들 놀라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누구냐가 관건이었다. 지금 연애 중인 사람은 태형이 밖에 없어서 아무래도 연애 중인 사람이 제일 위험했다.
"태형이 여자 친구랑 안 헤어졌지?"
역시나 태형인지 팀장님 말에 일제히 태형이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당황한 태형인 그렇다고 하면서 형들 눈치를 보면서 바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왔다.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반대편에 앉아있는 태형이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근데 여자 친구가 아니고....레드라인에 소희랑 났어.
너 솔직하게 얘기해. 양다리는 아니지?"
"네?"
팀장님이 내뱉은 말에 형들이랑 정국이랑 다 놀라서 태형일 바라보니 당사자인 태형인 몸을 펄쩍 뛰면서 손사래를 쳤다.
"팀장님, 저 진짜 아니에요! 걔는 진짜 동생 같은 애에요"
"그래. 그런 거 같아서 일단 아니라고 반박기사 준비중 인데 그래도 곧 스캔들 기사 뜰 거야. 그러니까 핸드폰 꺼놓고 다들 모른다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아아 진짜 죄송해요. 아 진짜 미치겠네"
"한 번쯤은 날 거 같았어. 그게 어쩌다가 태형이 너가 된거고. 당분간은 스케줄 말곤 외출 자제하고"
지수가 알면 상처받을 텐데...스캔들에 흔들릴 만큼 두 사람 사이가 얕지 않다는 건 알지만 여자들은 조그마한 거에도 서운할 텐데 사실이 아니어도 어쨌든 딴 여자와 스캔들에 얼마나 신경이 쓰일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방송활동을 하다 보면 어쩔 수없이 마주치는 일이 많긴 했지만 걸그룹이랑은 되도록이면 엮이지 않도록 주의하고 조심 하지만 인사까지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오며 가며 마주쳐도 정말 인사만 겨우 하고 지내는 정도였다. 매니저들을 통해서 번호를 물어와도 형들이나 정국이나 거절하는 건 칼 같아서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했다. 사람 좋아하는 태형이도 걸그룹이랑은 그래도 거리를 두는 편이었는데.
내가 정말 지수를 걱정하는 건지...
아님 애써 포장해서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 하는 건지 헷갈렸다.
그래도 지수와 난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매 한 가지였다. 얼만큼 절망을 맛봐야 마음이 무뎌질지 궁금했다. 이미 상처 나고 아픈데 자꾸만 누군가가 더 헤집어서 상처가 나을 시간이 없었다.
"아- 형 태형인 양다리 할 만큼 애가 부지런하지 못해요"
"글게요. 아따 니 능력자 다이 태형아- 형님들은 여친도 없구만"
형들은 태형이가 미안해하는 모습에 일부러 더 오버하면서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 장난을 쳤고 여전히 고개를 못 들고 억울해하는 태형이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다들 한 마디씩 하며 괜찮다고 사실이 아닌 건 지나가기 마련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누구도 태형일 원망하거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팀워크와 믿음은 더 강해져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형들이 먼저 감싸 안아줬기에 힘 든 일들을 잘 넘길 수 있었다.
"우리 지민이도 연애하고 싶어? 왜 표정이 우울해 응?"
사실이 아닌 걸 알지만 자꾸 서운하고 기분이 이상해서 표정이 이상했나 보다. 석진이 형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져서 무슨 소리하냐고 대꾸해도 이미 형들은 내가 연애하고 싶어서 환장한 애 취급을 했다. 계속 치근대는 석진이 형을 피하려 고개를 돌리니 태형이와 마주친 시선에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또 먼저 고개를 돌려 피하고 말았다.
"형- 얘 제 거에요. 박지민은 평생 연애 못해요 연애고자라,
그래서 내가 거둬주기로 했어요. 독거노인 되면 둘이 같이 살기로 "
윤기형이 미쳤는지 평소에 말 한마디 안 하던 사람이 내 어깨에 팔을 올려놓으면서 석진이 형보다 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면서 나를 보면서 웃는데 정말 공포스러워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몰래카메라가 의심될 정도로 포커스가 나에게 맞춰진 형들은 나를 놀리기에 더 바빴다. 아마 계속해서 나와 태형이 사이가 안 좋다는 걸 형들은 알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한 번씩 흐름을 타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우리들 나름의 화해 방식이었다. 하지만 태형이와 내가 왜 사이가 틀어졌는지 알 리 없는 형들은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단 걸 모르고 있었다.
내가 스캔들의 대상도 아니었고 굳이 당사자가 아닌 나에게 연락이 올까 싶어 안일하게 생각하고 켜 둔 핸드폰에서 연락을 받은 건 의아하게도 지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혹시 만날 수 있냐는 조심스러운 문자가 마음에 걸려서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태형이에게 얘기를 해야 하는 건지 두 사람 사이에 내가 괜히 나서서 문제를 일으킬까 망설여졌지만 나한테 까지 연락 온 걸 보면 기사 때문에 불안해서 그러는 것 같아 바로 스케줄을 끝나고 보자고 약속을 했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스케줄이 생각보다 늦어져서"
"아니야. 고마워 지민아"
"뭘 오랜만이다 진짜"
조용한 카페 안에 앉아 있는 지수와 마주 보는 게 얼마만인지 여전히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이 다른 날 보다 더 가녀리게 보여서 안쓰러웠다.
"기사 봤어....태형이"
"아 그래? 신경 쓰지 마 그냥 아는 동생이래. 태형이랑 연락했지?"
"나 사실....태형이 마음을 잘 모르겠어....
그래서 진짜 너한테 미안한데...창피한거 무릅쓰고 얘기하는 거야.
얼마 전에 태형이가 신경 쓰이는 사람 생겼다고 그러더라고 근데 그 사람이랑 절대 잘될 일 없다고..."
테이블 위에 컵을 만지작거리며 머뭇대던 지수가 생각하지도 못한 내뱉은 말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담담하게 얘기하는 모습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지수야, 근데 진짜 그 소희 씨는 친한 동생..."
"알아. 아까 태형이 문자가 왔었어 오해하지 말라고 오늘 그 기사 난 여자분은 해프닝이라고...근데 혹시 너한텐 별 말 없었어? 나 진짜 태형이 붙잡고 싶어서 그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른 채로 태형일 붙잡고 싶다는 지수의 말에 차마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나때문에.....여러 사람이 아프고 피해 보는 것 같아서
"걱정하지 마. 태형이가 그렇게 얘기했으면 그럴 일 없겠지....우리 활동하느라 바쁘잖아. 너 만날 때 말고는 잘 안나가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나한테 다 고민을 털어놓고 있는지수를 보니 내 마음 하나 숨기지 못해서 잘 사귀고 있는 두 사람한테 상처를 준 거 같아서...못 할 짓을 한 거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
"뭐 왜 임마. 왜 야리는데?"
"뭘 야려요..."
"니 눈빛이 존나 띠꺼운데 지금"
대기실에서 했던 윤기 형의 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나도 모르게 형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지 소파에 무기력하게 기대 있던 형이 몸을 일으켰다. 막방이어서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는데도 나 때문에 다들 외출도 못하고 숙소로 바로 돌아온 형들은 각자 방에서 쉬고 있는데 박지민은 또 최현을 만나러 나갔는지 아까 팀장님이 외출 자제하라는 말을 쌩까고 어느새 나갔는지 없었다.
"너 지민이한테 또 뭐 잘못했냐?"
"그냥...좀"
"그냥 좀이 아닌 거 같은데"
"형은...아까 그..아씨 아니에요"
사람 답답하게 왜 말을 하다 마냐면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는 형 때문에 머리를 헝클어뜨리니 여기서 할 말은 아니냐고 하면서 소파에서 일어나 우리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이래
"뭔 일인데 또 얘기해봐 이제"
다짜고짜 우리 방 침대에 누워있던 호석이 형을 거실로 내쫓고는 그 위에 앉아서 빨리 말해보라며 고갯짓을 하는 형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 긴장이 됐다.
"뜸 고만 들이고 불어라. 빨리"
"그게....그..뽀뽀를 아니 키 키스했어요!"
"누구랑? 설마 레드라인 소희? 새끼 양다리네 이거"
"아....걘 진짜 아는 동생이구요...하아...지민이랑요"
"누구? v.o.v에 지민 선배님 얘기하는 거야?"
설마 박지민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때 최현이랑 사귄다고 할 때도 내가 그렇게 화를 냈었는데 그래 놓고 박지민이랑 키스했다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욕할게 분명했다. 저 형은
"방탄에 박지민이요. 아! 아파요...그것도 내가 먼저 한 거 아니에요.
뭐 두 번째는 제가...하긴 했는데....어떻게 하다 보니까"
"두 번이나...허어..미친놈아 너 진짜!"
"박지민도 좋아했어요!"
"뭐 이 새끼야!"
지민이라고 하자마자 무방비하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는 정강이를 까이고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고 형은 충격을 심하게 받았는지 웬만해서 말발로 지지 않는 사람이 할 말을 잃은 채로 나를 바라봤다.
형한테는 왠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형은 내가 지금 처한 상황과 고민을 해결해 줄 것 같아서 그동안 지민이와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고 말았다.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 내가 좋다고 고백해 온 지민이 때문에 심란해서 대기실에서 키스한 것까지 숨김없이 다 얘기를 하고 나니 형은 더 어이가 없는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근데 그래 놓고 저 좋다 해놓고 최현이랑 또 만나잖아요!"
"하아......진짜 너네 뭐냐. 아니 어쩌자고 그..."
"저도 진짜 미치겠어요. 박지민 볼 때마다 돌겠어요.
그래 놓고는 없었던 일로 하자는데 그게 없던 일로 되냐구요....
심란해서 미치겠구만 지는 아무렇지도 않을지 몰라도 무심코 던진 돌에 두꺼비가 왜 맞아 죽는데! 형도 진짜 어이없죠?"
내가 얘기할 때마다 자꾸 일그러지는 형의 표정에 또 맞을까 봐 침대에 다리를 올리고 앉으니 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 형도 꼬셨어요? 지민이가? 아니 아까 대기실에서 형이 그랬잖아요. 데리고 살 거라고....."
"야 이 미친! 하아.....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나 띠겁게 봤냐?
"에? 아니에요. 제가 형을 어떻게 띠겁게 봐요"
형은 고구마 먹다가 목이라도 매인 것 같은 표정으로 가슴께를 툭툭 치면서 아이고 두야를 외치더니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누워있는 형을 한 번 쳐다보고 진심으로 심각하다고 밤에 잠도 못 자고 입맛도 없다고 엄마 아빠한테도 죄송스러워서 전화도 못하고 있다고 하니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내 마음을 묻는 형은 지민일 좋아하냐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고 머뭇거리자 그날 왜 지민이한테 키스를 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답을 하라며 더 이상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만 얘기하자며 일어나는 걸 붙잡았다.
"좋아하는 거 같아요!"
"같아요는 뭐냐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솔직히 최현이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질투도 나고
마음이 복잡했는데 지민이가 그러더라구요. 저보고 넌 왜 아닌 척하냐고 부추긴 저 보고도 잘못이라고 하는 그 순간 진짜 박지민 성격에 그때 어떤 마음으로 고백을 했을지 짐작이 가서 못 참겠는 거에요 그래서"
"야야야 거기까지만 얘기해! 알았어. 그래서 그 소심쟁이가 어떤 마음으로 너한테 얘기했겠냐 지민인 그래도 너보다 훨씬 용기 있고 멋있다 인마, 넌 앞으로 감당할 자신 있어? 내가 봤을 때 넌 아직 멀었다. 나한테 얘기할게 아니라 박지민한테 솔직하게 얘기했어야지 그렇게 망설일 거면 그냥 박지민 나줘"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숨겼던 마음을 처음으로 솔직하게 얘기한 건데 방법부터 잘못됐다고 하는 형 앞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서 멍하니 있으니 머리를 한 번 툭치고는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형을 붙잡지 못했다. 왜 다들 나한테만 그러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아니 왜 이렇게 쿨해! 저 형은...진짜 박지민한테 마음 있는 거 아냐?
닫힌 문을 민윤기라 생각하며 노려보는데 다시 열리는 문에 깜짝 놀라서 괜히 찔리는 마음에 급하게 형을 보며 웃었다.
"아! 그리고 최현이랑 헤어진 지 꽤 됐어 몰랐냐?"
아.....헤어졌구나
헤어졌다고?! 아씨- 윤기 형! 잠깐! 잠깐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