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화양연화_07
[뷔민]화양연화_07
때때로 주기적으로 밥을 먹고 스케줄에 치여 만나지 못할 땐 그가 숙소 앞으로 불쑥 찾아와 얼굴만이라도 짧게 보고 가기를 한 게 두 달이 다되어갔다. 남들이 본다면 정말 좋아서 죽고 못 사는 듯 간질간질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그가 하자면 하자는 대로 그냥 이끄는 대로 수동적인 생활에 녹아들어서 이러다 정말 그를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며 문득 떠오르는 반항심에 또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널뛰었다.
그나마도 지지난주부터 영화 크랭크인이 들어간 그는 지방 촬영 일정으로 부산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한 동안은 서울로 올라오지 못할 것 같다며 미리 생일선물까지 전하며 아쉬워했지만 나는 그의 스케줄에 자유를 얻은것처럼 숨통이 틔였다.
기념일까지 챙겨 드는 그의 자상함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고도 남을 만큼이어서 그와 비위 좋게 마주 보고 앉아 칼질할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골랐다던 팔찌는 부담스러울 만큼 고가여서 상자를 열어볼 자신이 없어서 그대로 가방 한 켠에 있었다.
"형- 지민이형. 뷔형이 생일선물 뭐 줬어요?"
"아직 못 받았는데."
"아. 뷔형 안되겠구만. 내께 젤 마음에 들죠?"
어제부터 당사자인 나보다 더 들떠선 받은 선물들에 더 관심을 보이며 누가 준거냐면서 뭐냐면서 옆에서 사사건건 참견을 하더니 막상 생일인 오늘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서운했다. 연습실에서 생일파티도 하고 숙소로 돌아와선 형들이나 정국인 선물을 안겨주며 축하한다고 했는데 태형인 어제도 이따가 주겠다며 자리를 피하더니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
선물보단 생일날 같이 있기만 해줘도 좋은데...
저녁을 먹으러 나올 때도 같이 가자던 정국이의 물음에 데이트하기로 했다는 태형이에게 실망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람 욕심이란 게 마음처럼 쉽지않았다.
"형-전화 오는데요"
정국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으로 눈짓을 해왔다. 끊어지지 않고 울리는 진동에 액정을 확인하니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에 표정관리가 안됐다.
'지민아-어디야?'
'나 정국이랑 밥 먹고 있지."
'어디서? 강남?'
'왜? 오게?'
'아, 지수가 니 선물 샀다고 해서 잠깐 같이 보려고 했지'
다른 날도 아니고 내 생일인데, 너에게 젤 친한 친구생일인 오늘 그것도 널 좋아하고 있는 나한테 여자 친구와 같이 만나자고 하는 건 너무...내가 불쌍하잖아
왜 그러냐고 묻는 정국이의 입모양을 힐끗보고 다시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애초에 난 널 이길 수가 없는데
'그래. 밥 먹고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가라앉는 기분에 입맛도 없어졌다.
정국일 앞에 두고 그러지 말아야지 해도 울렁거리며 들끓는 속에 진정이 안됐다. 부쩍 말수가 줄어든 내 눈치를 보며 까짓것 기분이라며 저녁까지 사준다는 정국이의 쑥스러운듯한 허세에 웃으니 형 지금 내가 많이 먹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냐 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낯가림이 심한 정국인 아직도 지수를 불편해해서 먼저 숙소로 가겠다길래 밥을 먹고 먼저 보낸 참이었다. 택시를 타려고 거리에 서서 태형이 보내온 주소를 확인하려 꺼낸 핸드폰에 잔뜩 떠있는 부재중과 카톡에 결국 태형이에게 가지 못했다.
놀이터 입구에 세워진 차를 보니 직접 운전해서 이곳까지 온 것 같아서 걱정이 먼저 앞섰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언제나 완벽할 거 같은 사람이 술에 취해 잔뜩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며 그네에 앉아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니 당황스러워서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멍청히 서있었다.
"안녕"
"술 먹고 운전했어요?"
걱정은 되냐면서 씁쓸하게 웃는 모습이 또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미워해야지 하면서도 보잘것없는 나한테 자존심까지 버리고 매달리는 게 이제는 그의 본모습이 어떤 것인지 짐작도 못하겠다
"...미안...참으려고했는데..못 참겠더라고"
"........."
"별로 보고 싶진 않았겠지만"
담담하게 속마음을 내비치는 그의 고백에 또 모질지 못해서 그가 앉은 그네의 옆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화 촬영을 들어가고 나서부턴 스케줄에 바빠 통화도 자주 못하다 보니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부재중으로 넘어가는 날이 잦아졌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예민해지고 날이서는 그의 목소리에 더 전화를 피하게 됐고 지금 부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건 그만큼 화가 났다는 것일 텐데 화는 커녕 술에 취해서 그런지 보고싶어서 왔다며 지나치게 솔직한 그의 마음에 또 막상 마주한 얼굴에 절절하게 느껴지는 그의 진심에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반팔에 슬리퍼만 신고 나온 걸 후회해봤자 이미 밖으로 나온 뒤여서 다시 옷을 껴입으러 갈 만큼 멀지 않은 거리에 살갗을 스치는 바람을 막으려 몸을 잔뜩 움츠리고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읏"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에 커플로 보이는 실루엣이 잔뜩 붙어선 진한 애정행각을 하고 있었다. 신성한 놀이터에서...자라나는 새싹들의 아지트에서 청춘을 불태우는 연인을 보니 괜스레 속이 쓰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키스라 로맨틱하네
남자의 품 안에 가득 안겨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니 굉장히 짧은 머리가 보이쉬한 게 내 스타일인데..
퍽 소리가 날정도로 였다. 오-꽤 아프겠는데.
품에서 벗어난 여자가 남자에게 뺨을 내리치더니 뭐라고 하는듯한 목소리가 여자의 것이 아닌 거에 놀라서 남자 둘의 치정에 잘못 엮였다가는 이기지 못할 것 같아서 자리를 비켜주려고 발걸음을 뗐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버렸다.
차마 뒤돌아서 확인할 용기가 안 났다.
벌게진 그의 뺨에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지 못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봤지만 뺨 정도는 각오했다는 듯 자조적으로 눈을 맞춰오는 그의 태도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요? 형한테 맞춰주고 하자는 대로 다하잖아요 근데 왜...왜"
"하-이제 좀 사람 같네. 이렇게까지 안 하면 너 나 쳐다보지도 않잖아.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 너 안 놓을거야.
비겁하다고 해도 괜찮아. 난 네 약한 부분을 계속 파고 들거고 그래서 아프고 상처나면 약도 줄게.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 지민아"
18살의 그날처럼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현실에 참기가 힘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런 취급을 받아가면서 내 마음을 지켜야 하는지 자괴감도 들면서 그와의 키스는 아프고 슬프기만 해서 괴로웠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복합적인 감정에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숙소 앞이었다. 고개를 들다 마주치는 시선 역시 복잡하고 잔뜩 생각이 잠긴 채여서
난간에 기대서 있는 서있는 형을 보니 불안감이 밀려왔다.
"윤기형...."
작업실로 오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침묵이 무얼 뜻하는지 알아서 두려웠다. 형이 알아버린 거다.
정말로 두려워하던 상황이 눈앞에 일어나버렸다.
거짓말을 하면 티가난다던 그와 마찬가지로 어설픈 거짓말로 윤기형을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형의 깊은 한숨에 자연스럽게 숙여지는 고개가 정말 죄를 지은 거 같아서 지금 이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박지민-형 봐봐
너 지금 행복해?.....진짜 최현 좋아해?"
윤기 형의 한마디에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견고하고 단단한 내 마음이 형의 한마디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눈을 맞춰오며 행복하냐고 묻는 형의 걱정 가득한 물음에 답할 수 없는 현실과 내 스스로에게 답답해져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대답 못해?"
답답할 정도로 착한 지민이었다.
소리도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며 우는 지민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왔다.
18살 어린 지민이를 처음 본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모습에 동생이지만 배울 점도 많고 기특해서 겉으론 잘 표현을 안 하지만 많이 아끼고 가족들 만큼이나 소중했다.
바보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착하고 미련스러운 박지민이 남들과 다른 사랑에 속으로 끙끙 앓아가며 가슴앓이했을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다가와서 다그칠 수가 없었다. 부모의 마음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그의 보호자로 동반자로 함께하는 멤버로서 너무 안타까웠다. 형으로써 믿음도 주지 못했나 싶기도 했고 또 그 정도로도 꽉 막혀 보였었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오히려 지민이에게 미안함 마음이 들어서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지민의 성향이 남다를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거기다 최현이라니. 두 사람은 접점도 없고 순진한 지민이를 꼬여내서 협박이라도 해서 곤란한 상황인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복잡한 머릿속을 생각하고 정리하느라 울기만 하는 지민을 잠시 기다렸다.
"형...죄송...해요"
"뭐가 죄송할 일이야. 연애 할수도 있고 남자라서 말 못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근데 너 진짜 행복한 얼굴이 아니라서 형은 걱정돼서"
"그런 거...아니에요"
두려워서 눈도 못 마주치는 애를 벼랑 끝으로 내몰 만큼 걱정거리를 안겨주기 싫어서 그럴듯한 말로 위로해주고 싶지만 멋없고 무뚝뚝한 성격 탓에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었다.
"후...널 탓하려는 거 아니니까 눈물 그쳐 넌 성인이고 네가 한 선택이니까 형은 존중한다. 근데 그 선택이 네가 불행한 거라면 난 끝까지 널 말릴 생각이야. 그러니 내가 필요하면 얘기해"
끝내 지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당장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지민이를 더 몰아세웠다간 애를 잡을 것 같아서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쉬라고 먼저 보냈다.
혹시나 다른 마음먹을까 나는 그런 거에 전혀 개의치 않으니 또 혼자 삽질하지 말고 곧장 숙소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며 말을 덧붙였다.
"지민아!"
퉁퉁 부운 얼굴로 숙소에 들어서니 놀란 형들이며 정국이의 걱정 어린 시선에 엄마와 오는 길에 통화하느라 감정이 복받쳐서 그런 거라고 하니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호석이 형은 막내가 따로 없다며 따듯하게 안아줬고 다 큰 어른이 길에서 울고 다니냐는 정국이의 놀림에도 가슴께가 시큰한 게 숙소로 오는 그 짧은 거리에서 느꼈던 허전함과 무서움이 싹 사라졌다.
"태형이는요?"
"방에 있지"
들어가서 쉬라는 형들을 뒤로하고 방에 들어오니 침대에 누워있던 태형이가 일어났다.
"아 왤케 늦었노!"
"기다렸어?"
"울었나? 얼굴은 또 왜글노"
"태태- 이제 내 생일 10분도 안 남았는데"
알고 있다면서 니가 늦게 와서 그런 거 아니냐면서 쑥스러운 듯 침대께에서 주섬주섬 포장된 것을 꺼내는 태형을 모습을 보니 그 와중에 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 전전긍긍하며 울어놓고도 태형일 보고 웃음이 나오다니 정말 속도 없이 좋아서
"대박! 이거 비싸잖아!"
까만색 케이스를 보고 설마 했는데 케이스 안에 반짝반짝하는 팔찌를 보니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구하기 힘든 팔찌였다. 너무 이쁘지 않냐면서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팔찌였는데 그걸 잊지 않고 선물해준 태형이에게 고마웠다.
"고마워. 너무 이쁘다! 아- 너무 좋아"
"내가 그거 구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나"
"니는 꼭! 아니다- 태태 고마워."
"생일 축하한다"
"지민이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 못 온다네"
"아 진짜? 어쩔 수 없지"
"미안해. 네가 신경 써줬는데"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 오지 못하겠다는 지민이 때문에 조촐하게 준비했던 것들이 말짱 도루묵이 돼버려서 곁에서 함께 준비해준 지수에게 미안해졌다. 하나뿐인 친한 친구에게 일 년에 한 번뿐이고 작년보다 나아진 능력에 좀 더 좋은걸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에 무리를 해서 준비를 했고 셋이서 작은 생일파티를 하려고 했는데 주인공이 없는 파티에 김이 새버렸다.
국내에서 주문을 하면 웨이팅이 한 달은 족히 걸린다던 브랜드 팔찌를 해외에서 주문을 했고 빠듯한 배송일자에 결국에 도착을 하지 못해서 생일인 오늘 선물도 전해주지 못하고 지수와 함께 발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방문한 매장에선 전화로 문의했을 때와 다르게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팔찌를 보여줘서 해외 배송을 기다리느라 전전긍긍했던 날들이 허무해졌다.
"그래도 선물은 사서 다행이네. 너 계속 불안해했잖아"
"아 불안한 게 아니라. 박지민 또 은근히 삐진다니까 꽁해가지고. 삐지면 얼마나 오래가는데 ..저번엔"
비싼 생일선물이었지만 지민이한텐 아깝지 않으니까 시간 안에 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